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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Oct 09. 2019

내 뒤꽁무니를 쫓는

그 남자의 사정

남편이 졸졸 따라온다. 내가 작은방에 가면, 작은방으로. 내가 부엌에 가면, 부엌으로. 내가 베란다로 나가면, 베란다로. 그만 좀 따라다니라고 면박을 줘도 그런다. 항상 그러는 것은 아니고 가끔씩 그런다. 우리가 서로 없이 죽고 못 살 것 같던 때는 이미 진즉에 지났다. 여름 더위에 서로 헐벗고 집안을 돌아다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정도로 우린 서로에게 매우 의연해진 상태다. 그런 그가 가끔씩 내 뒤꽁무니를 미친 듯이 쫓아다닌다. 마치 내 뒤를 놓치면 술래라도 되는 사람처럼 집착한다.


처음 몇 번은 '이이가 왜 이래?'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뺨이 붉어졌다. 저리 좀 가라고 돌아서서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웃음이 났다.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그저 귀여워 한동안은 별생각이 없었는데 어제 문득 진심으로 '이이가 왜 이럴까' 생각을 해보았다.


가끔씩 보이는 이 특정 행동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내가 좋아서 그러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특별히 예뻐 보이는 날도 아니고, 특별히 서로 못 본 지 오래된 날도 아니고... 하여튼 이런 행동의 배후에는 왠지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현실적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유레카.


남편 행동 심리학이라도 전공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 남자의 속내를.


남편은 청소가 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동안 그가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상황들을 다시 곱씹어보니 내가 청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내팽개쳐진 옷을 개서 옷장에 넣어둔다 던가, 어질러진 거실에 쓰레기들을 모아서 버린다던다, 작은 집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청소를 하고 있었던 때였다. 남편은 청소하는 나를 그냥 보고 앉아있는 게 불편했던 것이다. 불편하지 않으려면 본인도 청소를 해야 했는데 그건 또 귀찮았던 것이다. 내 시선을 피하면서 가장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장소는... 다름 아닌 내 뒤였다. 나를 졸졸 쫓아다니며 애교를 피우면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안전하게 아내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똑똑한데?'


남편은 내가 생각한 그 이상으로 똑똑했다. 똑똑한 남자가 내 평생의 이상형이었는데, 나는 정녕 나의 이상형을 만난 것이로구나.



똑똑한 남자

이상형 목록의 수정이 필요하다.


나는 그의 속내를 깨닫자마자 "자기 일 안 하려고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거지?"라고 물었더니 남편은 수줍게 웃으며 아무런 대답이 없다. 역시, 맞았어. 내 사각지대를 제대로 파고들었지만 어림없지!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는 아니라고. 남편의 옆구리를 인정사정없이 간지럼 태우며 응징해주었다. 남편은 이번엔 반대로 나에게서 도망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19평 밖에 안 되는 우리 집에서 나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나에게 사죄했다.


이제 이곳에 사각지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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