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컥 영어학원 선생님이 되었다. 대학교 졸업을 한 달 남겨 둔 시점이었다. 사람들은 미대 졸업을 앞 둔 내가 돌연 미술학원도 아니고 영어학원에 취직했다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의아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어학원에 취직하기 위해 대학을 다닌 것은 아니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영어 과외를 했고,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잘 맞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술은 밥을 먹여주지 못했다. 졸업이 임박하자 생계에 대한 압박은 배로 커졌고, 막다른 골목길에서 쫓기는 생쥐의 심정으로 일단 아무 구멍에라도 주둥이를 들이밀고 싶었다. 그 구멍이 나에겐 영어학원이었을 뿐이다.
첨언을 하자면, 나는 미술계보단 영어 사교육계에서 더욱 환영 받는 존재였다.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기에 비록 한국의 입시미술은 잘 알지 못했지만, 영어는 충분히 가르칠 수 있었다. 어쨌든지 영어 과외는 4년간의 학비와 생활비를 책임져준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일찌감치 미술을 포기했다. 미술이 너무 하고 싶어서 미대에 들어갔지만 미술로 밥벌이하는 방법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교수님들이나 시간강사분들도 가르치는 일이 그들의 주된 혹은, 유일한 밥벌이었다. 그쯤되니 하고 싶은 공부를 실컷했다는 자부심 정도가 내가 대학생활을 통해 얻은 전부였다. 당시 우리과 졸업전시 제목이 '어떻게 마음 편히 미술을 그만둘 수 있나'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모든 미대생들에게 주어진 최종 과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일부는 '어떻게'라는 단어에 방점을 두고 미술을 마음 편히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일부는 '마음 편히' 그만 둘 순 없다라며 휴학을 하거나, 대학원에 들어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유학 준비를 하며 미술계 안에서 버티기 위한 시간을 벌었다. 나는 고민의 여지없이 월세와 삼시세끼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깨끗하게 미술을 포기할 의향이 있었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영어학원을 알아 본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 전공이 쓸모있는 분야가 어디일까 고민했고, 구직 사이트에서 디자인 계열 신입채용 공고를 유심히 찾아봤다. 산업 디자인이던, 시각 디자인이던, 편집 디자인이던, 그에 맞는 포트폴리오와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디자인툴 한둘은 필수였다. 그때쯤 깨달았다. 순수미술 전공자는 밥벌이는 고사하고 취직이라는 냉정한 세계에 얹을 수저하나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 다음에 크면 절대 영어 안 쓸거야!'라고 떼쓰던 여자아이는 영어학원 구직정보에 기웃거릴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숨이 막혀오던 찰나, 눈길을 확 끄는 구인정보를 발견했다. 영어 도서관식으로 운영되는 학원이었고, 책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을 구한다는 말에 '바로 여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과 아이들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게다가 파닉스 교육이 가능한 선생님을 원했는데 파닉스야말로 내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수업이라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력서를 써내려갔다.
그 후 며칠간은 참을 수 없는 초조함에 시달렸다. 막상 이력서를 보내고나니 '이곳에서마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어쩌지?'하고 두려웠다. 당시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넣었던 모든 회사에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학원에서마저 연락을 받지 못하면 나는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 손상을 입을 것이 자명했다. 사실 그 당시 조금 불안정하긴 해도 영어과외를 계속 하고 있었고, 당장에 굶어죽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졸업 후 몇 달간 그저 쉬면서 침착하게 다음 스텝을 준비해도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부모님에게 완전히 경제적으로 독립한 나에게는 당장 내일 모든 학생이 과외를 그만둘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밤잠을 설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나는 실체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장기적인 시야를 잃고 벌벌 떨었다.
다행히 나의 우울은 곧 사라졌다. 이력서를 넣었던 학원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다음날 면접과 함께 간단한 시험을 쳤고, 학원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며 반색하는 원장님의 표정을 보자 월급이 적고, 거리가 멀고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고정적으로 나의 일상을 떠받쳐 줄 월급이 생겼다는 것. 그거면 족했다. 나는 면접을 본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덜컥 영어학원 선생님이 되었다. 꿈꾸던 미래는 아니었지만 매일밤 꾸는 꿈만으로도 충분히 뒤숭숭하던 때라 꿈꾸던 미래 따위 개나 줘버리라는 심정이었다.
조금은 충동적으로 얻게 된 직업이었지만 그 이후로 6년간 한 곳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마치 이 일이 내 천직이었고, 그걸 나만 모르고 있었던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르치는 일을 즐겼다. 평범한 직장인들은 누리지 못할 낮시간의 여유와 누군가의 삶에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더불어 그들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은 학원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가진 분명하고도 뚜렷한 장점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의 순수하고 엉뚱발랄한 영혼을 마주할 때면, 이 일을 하길 참 잘했다는 말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왔다.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낸 6년간 가장 많이 성장한 사람은 단연코 나였다.
어린시절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어른들은 태어날 때부터 아줌마, 아저씨이거나 할머니, 할아버지였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렇게 아이들의 마음을 몰라주는거라고. 그런 내가 어른이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니 새삼스러운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분명 나도 한때는 어린아이였는데 이제 더이상 해독할 수 없는 아이들 행동과 심리에 머리가 새하얘지기도 하고, 어릴 땐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어른들의 말이 토시하나 바뀌지 않고 내 입에서 튀어나와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아이들을 통해 내가 새까맣게 잊고 있던 어린시절의 나와 마주하는 경험도 했다.
돌이켜보면 나만 그 아이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도 그간 나를 더 좋은 선생님, 그리고 더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가르쳐주었다. 한명 한명 특별하고 소중한 영혼을 지닌 그 아이들과의 일화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그저그런 어른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깡그리 잊고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그런 꼰대 말이다.
이제 아이들과 함께 했던 지난 6년간의 밀린 일기를 써보려한다. 밀린 일기를 쓰자니 초등학교때 개학 며칠 전에서야 손바닥에 불이나도록 써내려간 방학일기가 생각난다. 당시에는 울며 겨자먹기로 쓴 일기지만 나중에 훨씬 시간이 지나고나서는 그걸 찾아 읽을때마다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는지...
나는 내 초등학교때 일기장을 꺼내 읽을 때마다, 배꼽을 잡고 웃다가도 코끝이 시큰해지는 경험을 한다. '이 아이가, 이렇게 성장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 심장이 뻐근해진다. 혹은, 철없이 명랑했던 어린시절의 내가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느껴져 그리움에 목이 잠긴다. 어른이 되어 다시 쓰는 일기도 그랬으면 좋겠다. 배꼽 빠지게 웃기면서도, 코끝이 시큰해지는 그런 일기.
이제 지난 6년간의 밀린 일기를 써보려한다.
선생님도 일기 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