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날 날 너와 내가 가 심하게 다툰 그 날 이후로
첫만남부터 꼬였다. 영어학원 첫 출근날부터 이렇게 꼬여도 되는건가.
오늘 출근하자마자 부원장님이 "선생님, 잠깐 저 좀 봐요"라고 하실 때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어제 민지랑 시은이하고 조금 트러블이 있으셨다면서요?
가볍게 툭 던진 물음에 내면의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원장님과 부원장님은 부부사이다.
원장님으로 말하자면 영어학원 원장님이라기보다는
패션업계 사람같은 느낌을 주는 40대후반의 남자다.
흰머리와 짙은 회색머리가 적당한 비율로 섞여서 자연스러운 은발에
적당한 살집이 있는 체형이지만 보통 한국에서 나고자란 40대 남자라면
절대 신을 수 없는 컬러의 양말과 자켓을 매치하는 센스를 보면
딱봐도 평범한 남자는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부인인 부원장님도 딱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면에서 원장님과 같지만
평범치 않음에 있어서는 원장님은 명함도 못 내밀정도다.
탈색한 금발머리를 아주 짧게 치고 체형은 미국에서나 볼법한 쓰리엑스라지(XXXL)다.
신기한 것은 분명 비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체형이었지만 결코 뚱뚱해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뚱뚱하다기보다 웅장하다던가 거대하다는 단어가 떠오르는 사람이다.
스타일은 히피나 히스패닉 계열의 옷을 주로 입고 굉장히 크고 화려한 주얼리를 매치해서
길거리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도 한 달은 또렷이 기억할 만한 인상을 남기는 분이다.
그런 그녀를 따로 독대하는 자리가 어찌 긴장되지 않겠는가.
아마, 그녀의 앞에 내가 아니라 작두 좀 탄다는 여느 무속인이 앉아있더라도
오줌 지리지 않고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다.
'어제 그 일이 트러블이라 부를만한 사건이었나?' 나는 다시 어제 일을 곱씹었다.
나는 그냥 인수인계 받은 도서관 규칙대로 아이들에게 주의를 준 것 뿐인데...
무언가 묘하게 꼬인 느낌이다.
"아 네...민지랑 시은이랑 무척 친한 사이인가봐요. 둘이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계속 소근거리길래 떨어져 앉으라고 했는데 제가 처음 온 선생님이라 그런지
얘들이 기분 나빠하더라구요."
어제의 사건은 이랬다.
우리 학원은 영어원서를 읽을 수 있는 도서관 공간과 수업을 하는 공간이 따로 있다.
선생님들은 수업 스케쥴에 맞춰서 수업을 하러 가기도 하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관리감독한다.
도서관이라는 공간 특성상 매우 조용한 환경을 유지해야하고
아이들이 온전히 독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선생님들이 분위기 조성에 특별히 신경을 써줘야한다.
나는 첫날이니만큼 의욕이 넘쳤고,
인수인계해주신 선생님께 들은대로 딱붙어 앉아서 떠드는 아이들에게
떨어져 앉으라고 주의를 준 것이었다.
민지와 시은이는 넓디 넓은 도서관자리 중에서도
선생님이 몸을 돌려 일부러 쳐다보지 않고는 보기 힘든 자리에 앉아있었다.
내가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는 전부 다섯에서 여섯명 정도 밖에 없어서 더욱 조용했다.
그러다보니 민지와 시은이의 속닥이는 소리가 고스란히 귀에 들어왔다.
첫날 근무였던만큼 그 아이들과도 첫만남이었는데
솔직한 인상을 말하자면 내가 선생님인데도 그 아이들이 좀 무서웠다.
둘 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시은이라는 아이는 키가 나만했다.
민지는 키는 작았지만 눈매가 매섭고 입술이 얇고 작아서
웃지 않으면 화가나서 입을 앙 다물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첫인상의 선입견 때문인지 이 포스 강한 초등학생들에게
절대로 만만한 선생님이란 이미지를 심어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뜩이나 순해보이는 인상 때문에 남들이 만만하게 보는 일이 많은데
첫날부터 어설프게 아이들 장단을 맞춰주면 바로 '만만한 선생님'으로 전락해버리기 십상이다.
나는 천천히 그 아이들이 앉아있는 자리로 걸어가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떠드는 아이들의 어깨를 톡톡 쳤다.
"민지하고 시은이 떨어져 앉자"
처음부터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강경한 어조였다.
아이들은 나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앉은 자세에서 눈을 치켜뜨고 "왜요?"라고 되물었다.
'왜요? 왜요는 일본요고......'라는 연식있는 멘트가 떠올랐으나
2002 한일월드컵도 본적 없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깨닫곤 바로 정신을 차렸다.
"둘이 떠들면 다른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니까 그렇지. 자 어서 한 칸씩 움직이자."
"아 왜요~~~~~~ 그냥 안 떠들고 옆에 앉을께요"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내가 대충 못이기고 타협하는 순간 나는 물이 되는 거라고.
나는 처음의 강경한 태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말했다.
"아니, 지금 바로 한 칸씩 옮겨앉자. 아무리 떼써도 안되는건 안되는거야. 앞으로도 도서관에 오면
무조건 서로 한 칸씩 떨어져 앉도록 해."
그 아이들은 눈에서 떼구르르 소리가 날 정도로 눈알을 굴렸다.
마치 내가 앞에 없다는 듯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전에 선생님은 그냥 같이 앉게 해줬단말이에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칙과 융통성 사이에서 나는 일말의 재고도 없이
'원칙이지! 선생님의 본분은 원칙을 지키는 거야!'라고 속으로 외쳤다.
한 명의 예외가 생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아이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지고
선생님이 하는 말의 권위도 점점 낮아지는 거라고...
"전에 선생님이 같이 앉게 해주었든 아니든 상관없어. 여기 도서관 룰이고
분명 아까 선생님이 뒤에 오는줄도 모르고 떠드는 걸 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선생님이 한 번 아니라고 하면 아닌거야."
아이들은 동시에 입을 삐죽이며 아까 떠들던 목소리보다
더 큰소리를 내며 책과 가방을 한 칸 옆 책상으로 옮겼다.
하필 그때 원장님이 도서관에 들어왔다.
격양되어있는 우리 세사람의 표정을 보곤
나에게 무언으로 '무슨 일이에요?'라고 묻는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조용히 가서 자초지정을 말하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선생님 말씀대로 한 칸씩 떨어져 앉아"라고 한마디를 했다.
내 말에는 꿈쩍도 안하던 그 아이들이
원장님의 한 마디에는 순한 양처럼 조용히 옆칸으로 옮겨 앉았다.
뭔가 떠드는 아이들하나 제대로 통제 못하는 선생님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곤 만만해 보이는 내 겉모습이 문제인건지,
그저 저 아이들이 원래 말을 잘 안 듣는건지,
내가 아이들이 다루는 태도의 문제인건지 생각이 돌고 돌았다.
그다지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첫날 일을 마치고 돌아갔는데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부원장님의 호출이라니...
으으...
부원장님 앞에서 어제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드리니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민지랑 시은이 참 여리고 착한 아이들이에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말 안 듣고 반항할 아이들은 아닌데
아마도 선생님과의 bonding(유대감)이 생기기 전에 negative(부정적인)한 상황에서 첫 만남을 갖게 되어 그런 거 같아요. 선생님이 원칙대로 아이들 지도해주신 것 참 감사하게 생각해요. 아이들과 bonding이 생기기 전에 훈육은 조심스럽더라구요. 혹시라도 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저한테 맡겨주세요. 당분간은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시고 서로가 익숙해지신 후에는 어제처럼 차분히 지적해주시고 지도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앞으로 아이들과 이런 저런 경험이 더 쌓이면 어제 같은 상황이 생겨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실 거에요."
사실 좀 감동했다.
마치 교무실에 불려간 학생이 된 기분으로 부원장님 앞에 섰는데,
나의 미숙함에 대한 질책이 아닌 이해와 따듯한 위로를 받은 기분이랄까.
와... 나도 이런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다,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에 있는 사람을 움찔하게 만드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닌 분이시지만
동시에 굉장히 따듯하고 자애로운 엄마같았다.
어떻게보면 간단한 이치인데 제대로된 훈육을 위해서는
먼저 그 아이와의 유대관계가 형성되야한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나같아도 생전 처음보는 사람이 굳은 표정으로 그런말을 했더라면
아무리 내가 잘못한 상황이라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을 것 같다.
부원장님께 아직 부족함 점이 많은데 앞으로 많이 알려달라고 말씀드리고
훈훈하게 마무리하고 나왔다.
잘못된 첫만남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분명 다시 만회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학원 첫 날의 교훈: 원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