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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Feb 02. 2020

수학 시간에 "Help"를 외치다!

묵음 'L'이 안겨 준 이불킥 추억에 대하여



출처: wayside school.fandom.com







"Help!"


 시끄럽던 교실이 내 한 마디에 일순간 조용해졌다. 파란 눈동자, 갈색 눈동자, 초록 눈동자, 검은 눈동자 어느 눈동자 가릴 것도 없이 모두가 나를 향했다.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했다. 모두가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마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나만을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가 해야 하는 말을 모두 했다.  


'내가 너무 소심한 탓이야, 조금 더 크게 대답하자!'


"Help!"


나는 다시 한번 용기 내어 더 크게 외쳤다. 나는 내 대답에 확신이 있었다. 미국 고등학교 생활 1개월 차. 다른 수업시간에는 여전히 쭈그리 신세를 면치 못 했지만, 수포자인 나도 미국 수학 시간에서만큼은 수학천재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더 큰 목소리로 대답한 뒤 교실 분위기는 더욱 뒤숭숭해졌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딱 마름모 체형을 한(진짜다. 머리는 나보다 작았는데, 엉덩이가 교실문을 정면으로 통과 못할 정도였다) 빨간 머리 수학 선생님의 얼굴에는 "What did you just say?(방금 뭐라고 한 거니?)"이라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때라도 알아차렸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이 무언가를 너무 확고히 믿을 때는 눈에 봬는 게 없는 법이다. 나는 내 작은 목소리를 탓하며 데시벨을 좀 더 높였다. 이래도 안 들리지 않겠지.


"My answer is Help!!!"      


마치 나의 마지막 대답이 얼어있던 교실을 '땡'하고 푼 것처럼 침묵으로 휩싸여있던 교실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여전히 영문을 몰랐지만 두 볼이 빨개졌다. 분명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수학선생님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Ohhhhh, a half?(아~ 2분에 1이라고?)"라고 묻더니 칠판에 1/2라는 숫자를 썼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Yes, help"라고 내 귀에도 잘 안 들릴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잠자코 있던 뒷자리의 한국인 친구가 "헬프(p)*가 아니라 해프(f)*라고 발음하는 거야"하고 귀띔해 주었다. 볼까지 빨개졌던 내 얼굴은 이제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글로 P와 F 소리를 명확히 구분해서 표기할 수가 없어서 두 소리를 모두 '프'라고 표기했고 뒤에 알파벳을 함께 써서 차이를 나타냈다. 


 선생님은 "That's right. The answer for number three is a half!(맞아요, 3번 문제의 정답은 이분에 일이죠)"라고 말하며 그때까지도 낄낄거리던 몇몇을 향해 나무라는 눈짓을 했다. 선생님이 아무리 잘 풀었다고 칭찬을 해주어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p, helllllllllllllppppppppppppp!!!!!!!!가 이명처럼 내 귓가에 울리고 또 울렸다.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내 작은 목소리를 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3번 문제의 답이 무엇인지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조그만 목소리로 "도와주세요"라고 하니 깜짝 놀라 쳐다보았을 뿐. 거듭 큰 소리로 도와달라고 외치는 이 여학생이 도대체 무슨 도움이 필요한 것인지 파악하느라 모두가 숨죽이며 내 표정 하나하나를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내가 수학 시간에 'help(도와주세요)'를 목놓아 외친 후에도 세상은 똑같이 돌아갔다. 아이들은 똑같이 시답잖은 장난을 치며 떠들어댔고,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수업도 끝이 났다. 그러나 주인공만 빼고 주변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아까 그 장면에 박제되어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Half의 L이 묵음이라............


P와 F가 다른 발음이라니............. 오 세종대왕이시여. 이 불쌍한 소녀를 구하소서!!!!!!!!!!


 세계에서 제일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우수한 언어, 한글을 모국어로 쓰고 있는 나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일이 생기다니! 어릴 적 가나다라를 배운 이래로 한글을 엉뚱하게 읽어서 창피당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영어는 그런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당최 발음도 안 할 거면 L은 왜 달고 있냐는 말이다. (지금도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이런 불평을 계속 듣는다. 내가 그 마음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아무렴.)


  또한 '프렌드', '프렌치프라이', '프리덤', '풋볼', '프린터', '피시'에게 모두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단순히 한국에서는 영어 외래어가 많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이 단어들도 알고 보니 한국산이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다 아는 지독한 몰래카메라의 희생양이 된 느낌이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유튜브도 없었고, 스마트폰도 없었다. 최신식 학습 도우미라고는 아빠가 같이 일하는 분에게 받았다는 손바닥만 한 전자사전이 전부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전자사전에서 흘러나오는 'half'라는 발음을 듣고 또 들었다. 내 평생 half와 help의 발음을 착각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이를 갈면서...





 그날 밤, 나는 호수 한가운데에 빠진 꿈을 꿨다. "해프(f), 해프(f)"를 목놓아 외쳤지만 그 누구도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푸른 눈의 외국인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멀뚱히 쳐다봤다. 나는 끝까지 발버둥 치며 해프(f)를 외쳤다. 뭔가 잘못됐는데 꿈속의 나는 그게 무엇인지 끝까지 깨닫지 못한다. 몸은 천천히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고, 숨 막히는 고통이 절정에 치달았을 때 이불킥을 하며 잠에서 깼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쓰바... 꿈이네.'












이불킥 하지 않는 영어상식 뽀너스!



'P'와 'F' 발음 정확히 하는 법

P: 입술이 상대편에게 보이지 않도록 안쪽으로 말아 앙다문다. 그 상태에서 1분간 물속에서 숨을 참다가 물 밖으로 나왔다고 상상하고 'ㅍ'하고 숨을 뱄는다. 이때 주의할 점은 '으'소리가 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프'가 아니라 'ㅍ'하고 숨이 터져 나오는 느낌만 주면 끝!


F: 토끼 이빨을 만들 듯 위쪽 앞니로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문다. 그 상태에서 앞니와 입술사이로 바람이 슉- 새어나가도록 한다. 이때도 역시나 한국 사람들 습관처럼 '으'를 붙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바람이 새어나가는 소리, 그게 끝! 


'L'이 묵음인 다른 단어들 

talk(턱-ㅋ), chalk (쳐-ㅋ), walk(워-ㅋ), calm(캄), palm(팜), calf(캐-f), yolk(요우-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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