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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Feb 04. 2020

그래도 고마워, 세일러문!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푼 지구과학 시험 



 




 때는 2000년 9월. 미국 고등학교 입학 일주차. 나의 모든 감각은 극도로 예민하게 열려있다. 선생님 눈썹의 미묘한 움직임, 입꼬리의 각도, 시선의 방향, 미간의 주름 개수... 이 모든 것이 나의 생존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주파수가 맞지 않은 라디오 세계로 빨려 들어온 것처럼 주변의 모든 말들이 의미로 변환되지 못한 채 부서진다. 그저 치지직, 치직, 칙 하고 두통을 일으키는 소음일 뿐이다. 


 당시 미국 한인사회에서 이런 말이 유행했다. 장님 1년, 귀머거리 1년, 벙어리 1년이면 미국에서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영어를 하게 되어있다고. 나는 그럼 1088일만 더 버티면 되는 건가. 봬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고, 입도 뻥긋하지 않아도 집에만 오면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 기력이 쪽 빨린 기분이다. 머리가 과부하 걸린 컴퓨터처럼 언제 피슝-하고 꺼질지 모르겠다. 인지하지는 못해도 나의 뇌는 새로운 언어를 흡수하려고 사력을 다해 돌아가나 보다. 






 


여느 때처럼 다음 교시를 알리는 벨소리를 듣자마자 분주하게 다음 교실로 찾아갔다. 처음 일주일은 그야말로 헬(hell)이었다. 다음 교시로 이동시간은 겨우 5분 남짓. 어디가 어딘지 모른 채 수많은 이동 인파들을 뚫고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찾아가야 했다. 물론 종종 늦었다. 하지만 일주일쯤 지나니 이동 후에도 숨 고를 시간이 남았다. 


 다음 수업은 지구과학(Earth Science) 시간이었다. 그저 제시간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앉아있었을 때, 선생님께서 칠판에 큼지막한 글씨를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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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퀴즈. 퀴즈는 알겠는데 그 앞에 '팝'이란 단어는 왜 붙은 걸까. 한껏 예리해진 내 감각에 의하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참이었다. 저 단어를 보자마자 반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탄식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이 탄식! 어딘지 익숙해. 이어서 모두가 꺼냈던 교과서를 가방에 집어넣더니 책상 위를 비웠다. 아, 이 장면 너무 익숙해!!


Pop quiz는 깜짝 시험이로구나! (X 됐네...)


내가 유난히 심하게 귀머거리(?)가 되는 수업이 바로 이 지구과학 시간이었다. 난 배운 게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시험이란 말인가... 잔인한 인생. 한국에서는 수업만 똑바로 들어도 부끄럽지 않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는데 미국에서 나는 강제로 똥 멍청이가 되어버렸다.


곧이어 시험지가 전달되었다. 까만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로다. 내가 받아 들 성적보다, 앞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견뎌야 하는 이 시간이 더 걱정스러웠다. 문제를 풀 의욕은 배꼽의 때만큼도 없었다. 참고로 나는 배꼽에 때가 없다. (믿거나 말거나 흐흣) 


너무 심심해서 문제를 속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던 그때. 문제의 보기에서 친숙한 단어들이 보였다.


(a) Mars

(b) Jupitar

(c) Mercury

(d) Venus    


ㅁ..... 마...... 마알... 스....... 마스?! ㅈ.. 쥬.... 피.. ㅌ.. 탈......... 주피터?!! 므... 얼...ㅋ.. 큐... 리........... 머큐리?!!! 브이.. 에...ㄴ.. 느어... 스............ 비너스?!!!!!.................


왓?!!!!! 세일러문?!!!!!!!!!!!!!!!!!


 한 줄기 전율이 몸을 타고 흘렀다. 종이 넘기는 소리와 연필의 사각 소리뿐인 적막한 교실이었지만 내 귓속에서는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살며시 너에게로 다가가...♪' 추억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렸다. 


 내가 이 문제는 기어코 풀고 만다! 세일러문을 보며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이며, 세일러문 카드 모으는데 투자한 노력이 얼마인데... 이 문제를 틀리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문제를 천천히 읽어보니 Planet(행성), second(두 번째), sun(태양)이란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달의 요정 세일러문은 제일 먼저 머큐리를 만났다. 파란 단발머리의 머큐리는 물을 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만나는 캐릭터는 마스. 검고 긴 생머리에 화끈한 성격. 내 최애 캐릭터였다. 화끈한 성격답게 불을 쏜다. 세 번째로 만나는 캐릭터는 주피터. 갈색 곱슬머리를 하나로 묶은 소녀. 성격은 털털하고 힘은 장사다. 이건 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이 나와버렸다. 세일러문이 두 번째로 만나는 캐릭터가 정답이다. 나는 호기롭게 (a) Mars에 체크를 했다. 


 훗,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순서가 그냥 아무렇게나 정해진 게 아니었군. 마치 꾸러기 수비대(이 만화를 모르는 세대분들에겐 미안하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궁금하면 검색 고고씽)를 통해 십이간지를 배우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다만, 십이간지 순서를 알아내려면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자축인묘~♪ 드라고, 요롱이, 마초, 미미 진사오미~♪ (중략)' 이 만화 주제가를 처음부터 원하는 위치까지 차례대로 다시 불러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테레비가 결코 바보상자일 뿐만은 아니었다.


행성의 순서에 대한 문제로 예상되는 문제들이 몇 개 더 있었다. 우라누스, 넵튠, 플루토, 새턴... 세일러문 시리즈를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시청한 보람이 있었다. 그저 요상한 이름인 줄 알았던 캐릭터의 이름들이 모두 행성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라니. 






다음 날 나는 D- 가 적힌 팝퀴즈 시험지를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F가 아닌 걸 감사해야 했을까. 나는 '태양에서부터 두 번째로 먼 행성은?'으로 추정되는 문제의 답이 마스(Mars, 화성)가 아니란 사실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왼쪽부터 비너스, 머큐리, 세일러문, 마스, 쥬피터)



 정답은 비너스(Venus, 금성)였다. 나는 교과서 뒤쪽에서 컬러로 프린트된 행성 순서 도표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행성들은 세일러문에서 소녀들이 처음 등장하는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으나, 가장 중심 캐릭터인 머큐리, 마스, 쥬피터, 비너스의 순서는 약간 달랐다. 


이건 마치 '다음 중 가구가 아닌 것은?'이라는 문제에 '침대'라고 대답한 격이다. 왜냐?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니까!!! 테레비가 바보상자가 아니라 테레비에서 나온 것을 곧이곧대로 믿은 놈이 바보상자인 것이다. 








 그 날 나는 한국에 사는 친구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생각해보니 그때 당시 미국 가정에서는 인터넷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너 그거 아니. 세일러문에 마스가 두 번째로 등장하는데 태양계에서 두 번째 행성은 마스가 아니라...(중략)'


친구의 답장에는 쥬피터가 만화에서 두 번째 등장한게 아니었냐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그런 시덥잖은 내용으로 채운 편지로 서로가 각자의 나라에서 여전히 잘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제와 누가 두 번째이건 중요치 않았다. 그 시험을 계기로 나는 모든 행성의 이름과 철자, 순서를 모두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세일러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시험은 망쳤지만 그래도 고마워, 세일러문!  





"행성 순서와 영어 이름 잊지 말라규!"






PS. '영어는 이불킥이지' 겨우 두 번째 에피소드인데 벌써부터 이불킥을 다시 하고 싶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단 영어의 문제만은 아닌 듯, 진짜 멍청한 에피소드들이 앞으로 줄을 이을텐데... 와 진짜! 부끄러운 과거 대방출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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