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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Feb 12. 2020

편의점 인간(무라타 사야카)

우리는 동그라미가 될 수 있을까.

편의점 인간 _무라타 사야카







  '편의점 인간'은 항상 읽고 싶은 책 리스트 맨 앞에 있었던 책이다. 몇 년간 도서관에 갈 때마다 누군가 이미 빌려가고 없었다. 그저 예약 신청을 하거나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하면 됐을 일이지만, 나는 운명처럼 책이 그곳에 있길 바랐다. (혹은 귀찮았다) 그렇게 나의 운명을 시험한 지 몇 해만에 이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기다림은 길었지만 책은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이기 때문에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듯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좋아하는 음료를 마시며 읽고 싶었다. 조용한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즐겨 마시는 아인슈페너를 홀짝이자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읽는 속도가 꽤 느린 편인데도 서너 시간 만에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었다. 책을 덮고 났을 때 굉장한 충족감을 느꼈다. 나의 서너 시간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책장을 다 넘기고 났을 때에도 나의 일부는 책 속의 세계에서 뛰놀고 있었다. 나를 오래도록 붙잡아주는 책이 좋다. 카페를 나설 때에는 이 책을 읽은 타인과 재잘거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소설은 후루쿠라(소설의 주인공)가 일하고 있는 편의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사는 곳에 그쳤던 편의점이란 공간을 하나의 독립된 생태계로 매우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곳에서는 그곳만의 시간과 규칙이 있다. 수많은 물건들과 그곳을 채우고 있는 인간은 조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편의점이란 세계에서 주인공은 잘 들어맞는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어 능숙하게 맡은 일을 처리한다.


손님의 미세한 몸짓이나 시선을 자동으로 알아차리고,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눈과 귀는 손님의 작은 움직임이나 의사를 포착하는 중요한 센서가 된다. 필요 이상으로 관찰하여 불쾌하게 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포착한 정보에 따라 재빨리 손을 움직인다.  


하루의 시작. 세계가 눈을 뜨고, 세상의 모든 톱니바퀴가 회전하기 시작하는 시간. 그 톱니바퀴의 하나가 되어 돌고 있는 나. 나는 세계의 부품이 되어 이 '아침'이라는 시간 속에서 계속 회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정교한 톱니바퀴(후루쿠라)는 편의점이라는 세계를 벗어나는 순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멩이가 돼버린다. 편의점 밖의 세계에서는 드르륵 하고 같이 맞물려 도는 게 아니라 혼자서 튕겨나가거나 괴상한 파열음만 내기 일쑤다. 초등학교 시절 맞붙어 싸우고 있던 남자아이들을 말리려고 도구함에 있던 삽을 꺼내 그들의 머리를 후려친 그녀는 "말리라고 해서 가장 빠를 것 같은 방법으로 말렸어요, "라고 말한다. 긴말이 필요 없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다.


학교에 불려 나온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안한 듯 중얼거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또 뭔가 나쁜 짓을 저질러 버린 모양이지만, 나는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타인과 공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그녀는 침묵을 택한다.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그만 두기로 결심한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놀랄만한 격한 사건은 사라졌지만, 조용한 것은 또 그것대로 문제가 되었다. 어떤 방식이든 그녀는 '보통'의 사람으로 분류되어 세계에 녹아들 수 없었다. 가족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의 곁을 지켰지만,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받아들였다기보다 언젠가 '고쳐질 것'을 헛되이 믿으며 당장의 불안을 참아낸 것에 불과했다.


 세월은 흘러 그녀는 대학교 1학년이 되었다. 우연히 편의점 아르바이트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된다. 그녀는 편의점의 세계를 접하고 나서 스스로 '편의점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고백한다. 편의점의 세계를 알기 전의 그녀는 쭉정이의 삶을 살았다. 모두에게 '걸러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이물질일 뿐이었다. 그러나 편의점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미소를 짓고, 정해진 행동 양식과 절차를 따르기만 하면 '점원'으로서 차별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한 세계의 어엿한 톱니바퀴가 되는 순간이었다.


대학생, 밴드를 하고 있는 젊은 남자, 프리터, 주부,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학생 등 다양한 사람이 같은 제복을 입고 '점원'이라는 균일한 생물로 다시 만들어져 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날의 연수가 끝나자 모두 제복을 벗고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꼭 다른 생물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편의점 인간'이라는 제목이 고스란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편의점이 후루쿠라에게 처음으로 정체성을 부여해주었다. 고로 후루쿠라는 편의점에서만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는 생물인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편의점에서 일을 하기 위해 먹고, 컨디션을 관리하고, 잠이 들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다. '편의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그녀에게 편의점이라는 세계 자체가 삶의 이유가 된다.


이 책에서 시라하라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후루쿠라와 마찬가지로 사회 부적응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끊임없이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넋두리를 쏟아낸다는 점에서 후루쿠라와 결이 다르지만 묘하게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동질감이 있다. 사회는 그들과 같은 부적응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가 그럭저럭 사회에 맞춤한 톱니바퀴라고 생각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시라하가 쏟아내는 넋두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공감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밖에 나가면 내 인생은 또 강간당합니다. 남자라면 일을 해라, 결혼해라, 결혼을 했다면 돈을 벌어라, 애를 낳아라, 무리의 노예예요. 평생 일하라고 세상은 명령하죠. 내 불알 조차 무리의 소유예요. 성 경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정자를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취급당한다니까요."


결국 나도 일정 부분은 맞지도 않는 톱니바퀴를 억지로 깎아내며 살아가고 있다. 나를 깎고 또 깎아서 사회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잠시 스르륵 돌아가면, '내'가 사라지는 과정과 고통은 결국 당연한 것이 돼버린다. 그리고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는 자들에겐 '루저 딱지'를 붙이거나, 경솔한 훈수를 두며 얻는 저급한 만족을 연료 삼는다. 안타까운 점은 사회가 '정해놓은 틀'이라는 게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걸 내가 모르지는 않는다.


타인이 지니고 태어난 온전한 그들만의 세계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재단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 지나친 욕심일까?


내가 쭉정이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쭉정이를 걸러내고 싶은 욕망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 타면서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우리의 톱니바퀴가 서로 부딪 갈리고 갈리다 보면 언젠가 매끈한 원이 될 수 있을까? 너와 내가 서로를 돌리거나 돌려지지 않고 마음껏 굴러다닐 수 있는 세계를 잠시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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