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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Mar 06. 2020

28 (정유정)

코로나 19 시대에 읽는 소설 28...



정유정 작가 책을 좋아한다. 나는 어느 작가가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다른 책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고 읽는다. 실망하거나 후회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딱히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정유정 작가의 책은 '7년의 밤'을 읽고 흠뻑 빠져서 '종의 기원'도 읽었다. 역시나 시간을 잊게 하는 흡입력이 있었다. '28'은 표지를 보아도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려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매력적인 표지 디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작가 이름을 보고 골랐다.


이야기는 아이디타로드 개썰매 경주를 배경으로 시작하는데 낯선 배경과 낯선 상황임에도 초반부터 강하게 붙드는 글의 힘이 느껴졌다. 개썰매에 관련된 이야기인가 보다 하고 읽었는데 웬걸 배경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빨간 눈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였다. 개와 사람 모두에게 전염이 되는 인수공통 전염병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축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하필이면 코로나 19로 공포감이 고조되던 시기에 읽게 되어 무엇인 현실이고 무엇이 소설 속 상황인가 싶을 정도였다.


이런 소설의 특성상 스포일러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 세부적인 내용은 담지 않겠지만 어쨌든 내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게 펼쳐지는 상황들로 소설의 생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소설 속에서는 화양이라는 가상의 도시가 빨간 눈 전염병의 진원지인데 아무래도 지금의 대구를 연상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코로나 19는 인수공통 전염병이 아니라는 것, 잠복기가 2주 정도로 길다는 점(소설에서는 거의 하루 이틀 만에 증상이 나타난다), 치사율이 낮다는 점(소설에서는 걸리면 거의 죽는다고 봐야 한다), 비말 감염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점(소설에서는 감염 경로를 파악조차 못한다) 등이 희망적이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두 가지다. 첫 번째로 동물(개)의 로맨스에 같이 설레고,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각각의 인물들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펼치는데 그중에 한 화자는 바로 늑대개이다. 얼마나 상남자인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하는 짝에게만큼은 또 그런 로맨티시스트가 없다. 많은 여자들이 환장한다는 바로 그 츤데레의 정석이다.


 이 책이 인상적이었던 두 번째 이유는 소설에 사용된 어휘였다. 사전을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단어들이 꽤 있었다. 그중에는 결국에는 찾아본 것이 있었다. '관창'과 '카메오'가 바로 그것이다. 관창은 소방호스를 연결하는 주물로 만든 손잡이 부분이고 카메오는 사진 같은 것을 넣을 수 있는 장식품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무엇인지 알지만 그 정확한 명칭을 들어보거나 알려고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나는 소설 속에서 그런 낯선 단어들을 접할 때마다 그저 놀라웠다. 작가는 어떻게 그 명칭들을 다 알아냈을까, 그리고 세상에 이름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하고. 비단 그런 특정 명사뿐만 아니라 평상시에 접한 적 없는 어휘들은 소설의 또 다른 재미이자 유익함인 것 같다.


이야기 중후반에는 조금 이야기의 텐션이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끝나는 순간까지 손에 땀을 쥐며 놓지 못했던 정유정 작가의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다 읽고 나서 여러모로 만족감을 느꼈다. 그중에서 화양이라는 도시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도시를 봉쇄하기로 결정한 정부에 대해 나라면 어떤 입장일까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 소설은 화양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화양 내부에 있는 시민들에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전체가 다 병들기 전에 꼬리 자르기를 해야 한다는 점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옳은 말 같아 보였는데 내가 그 잘려나갈 꼬리라고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단지 전염병이 발생한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건강한 상태의 사람들까지도 그 안에서 같이 죽으라니... 이건 아니지 않나? 그런데 만약 내가 잘려나갈 꼬리 쪽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하게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려고 들 것이다. 왜냐? 내가 살아야 하니까. 인간의 이기심은 자기의 목숨 앞에서는 너무나 정직하다.


이 소설은 전염병을 소재로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려고 했다기보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내밀하게 살펴보고자 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살아남고자 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한 마디가 이 책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코로나 19로 어지러운 이 시기에 읽으면 좀 더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소설책이다. 앞으로도 정유정 작가의 책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빌려 읽을 용의가 있다.






PS. 읽는 내내 책의 제목 '28'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화양에서 28일간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서라고 한다. 자연스레 영화 28일후가 떠올랐는데 작가의 인터뷰에서 그 영화와 상관없이 지었던 제목이라고 한다.


PS. 이 글을 쓴지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 알고보니 코로나19가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박쥐에게서 옮겨 왔으니 너무 당연한 사실인데;;; 나의 무식함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아무튼 정정을 필요했지만 추신으로 대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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