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지만, 정신 차려보면 심각한 이야기
작년에 우연히 악스(AX)라는 소설을 읽고 발견한 보석같은 소설가다. 처음에는 별기대도 없었고 읽다가 재미없으면 그만 읽으려 했는데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책을 다 읽고 그제야 이 작가를 기억해야지 생각하며 검색을 해보았더니 예전에 친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마왕'이란 책을 썼던 작가였다. 역시 하나를 잘 쓰면 나머지도 잘 쓰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일주일 전에 밀리의 서재에서 문자가 왔다. 다시 돌아오면 한 달 무료 이용권을 주겠단다. 작년에 한 달 무료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가입하고 홀딱 반해서 몇 달간 계속해서 결재를 했는데 어느 순간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열정이 시들해져서 해지를 했었더랬다. 공짜의 유혹은 뿌리치기 어렵다. 게다가 코로나19로 도서관도 무기한 휴관을 한마당에 한 달간 마음껏 책을 읽게 해준다니... 엎드려 절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시 돌아온 밀리의 서재에서 책들을 살펴보던 중 익숙한 '마왕'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읽기 버튼을 눌렀다. 신기하게도 처음 몇 장밖에 읽지 않았는데 "바로 이런게 '이사카 고타로'의 글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베어있는 문장과 가벼운 듯 진지한 분위기가 이 소설가의 시그니쳐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 책은 크게 두 장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안도라는 형의 이야기, 두 번째는 동생 준야 이야기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첫 장은 안도가 화자인 반면 두 번째는 준야의 이야기지만 그의 아내 시오리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끈다는 점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건과 이야기들이 펼쳐지지만 그 조각들을 조금씩 따라가다보면 작가가 이 형제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어떤 담론을 펼치고 싶었는지 깨닫게 된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허, 뭐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다 있어?'하고 한 쪽 입꼬리를 씰룩이며 읽다가 '앗, 당했다! 엄청나게 심오하고 굉장해!!!'하고 혀를 내두르게 된다.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그래도 간단히 줄거리를 이야기 해보자면 어느날 갑자기 굉장히 시덥잖고 하찮은 초능력을 얻게 된 형 안도가(내 입장에선 전혀 시덥지 않고 엄청난 능력인데...) 자신의 그 초라한 초능력을 사용해서 자신의 거대한 두려움에 맞서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형에 이어 동생 준야도 굉장히 사소한 능력을 갖게 되는데... 나는 그 능력이 그렇게나 부러울 수가 없었다. (궁금하면 이 책을 읽어보시라!)
각설하고 이 소설은 파시즘으로 대변되는 집단 행동의 명과 암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이 약삭빠르고 영리한 정치인에 의해 교묘하게 조종 당한 사례는 역사에서 흔히 발견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형성된 집단사고를 깨달았다고 한들 한낱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개인이 느끼게 될 공포와 무력감은 또 얼마나 클까?
자신이 마주한 공포와 맞서 싸우기 위해 형 안도는 "생각해, 생각해"를 되뇌이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반면 동생 준야는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를 되뇌이며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타개하려 한다. 이 두 형제의 대비가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코믹하다.
사회를 둘러싼 묵직하고 심각한 주제를 이 소설에서처럼 가볍고 유쾌하게 들리게 만들 수만 있다면 어린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유익한 담론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만약 학교 선생님이었다면 이런 보석 같은 소설들을 교과서로 삼아 깊이있는 대화를 나눠보았을 것 같다.
소설에서 뚜렷하거나 명쾌한 결말은 나오진 않는다. 다만 아래 대화를 통해서 작가의 최종 변론이랄까? 마지막 당부랄까? 그가 스스로 도출해낸 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엉터리라도 좋으니까 자신의 생각을 믿고 대결해 나간다면."
"나간다면?"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 형은 그렇게 말했어." 준야는 깨어 있으면서도 잠꼬대를 하는 것만 같았다. "형은 그렇게 말하곤 했어."
나도 엉터리라도 좋으니까 내 생각을 믿고 대결해 나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