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게인, 자각몽

오늘은 기필코 꾸고 말 거야!

by 마리뮤




4개월 만에 또 자각몽을 꿨다. 지난번에도 자각몽을 꾸고 신기해서 글을 남겼었는데 확인해보니 작년 10월이었다. 그때는 하늘을 나는데 집중을 했지만 이번엔 꿈인 것을 깨닫자마자 지난번 꿈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떠올렸다.


꿈은 온전히 나의 프라이빗 영역이라는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야한(?) 생각이 떠올랐다. 꿈속에서는 내가 원하는 로맨스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겠다는 음흉한(ㅋㅋ) 흑심이 들자마자 나는 미친 듯이 하강했다. (살려줘. 잘못했어.)... (중략)... 능숙한 하늘 날기 실력 키우기와 또 하나의 훈련과제가 생겼군. 훗.(흑심 흑심) _ 2019.10에 브런치에 남길 글 중


무려 4개월 전에 마음에 담아 둔 계획인데 자각몽을 꾸자마자 1초 만에 떠올린 나의 기억력과 집념 칭찬해.

(짝짝짝)


그래서 본격적으로 나는 내 꿈속 로맨스(19금)의 감독이 되기로 작정했다. 여주는 무조건 나였다. 감독의 힘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냐며. 남주는 미안하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아... 이 글을 '쉿 남편한테는 비밀이야' 매거진으로 옮겨야 하나;) 때마침 전날 본 영화에 남자 주인공으로 정했다.


내가사랑했던모든남자들에게.jpg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 남주: 노아 센티네오, 여주: 라나 콘도르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은 전형적인 하이스쿨 로맨스 영화인데 취향은 나이를 먹지 않는가 보다. '에헤 유치해.' 하면서도 끝까지 보고 있는 걸 보면. 게다가 2편도 나왔다고 2편도 다 봄.


실제 여주는 베트남계 미국인이지만 영화에서는 엄마가 한국인인 혼혈로 나온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여주에게 감정 이입하기가 훨씬 쉬웠다. 아무튼 모든 미국 하이틴 영화의 공식처럼 주인공 남자는 Jock(체격 건장하고, 잘 생기고, 인기 많은 스포츠맨. 보통은 미식축구부 주장 ㅋㅋ)이다. 그리고 역시나 빠지지 않는 공식처럼 남주에겐 치어리더 여친이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한국계 혼혈 여주와 우여곡절 끝에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인종을 넘어서 딱 나 같은 평범녀의 판타지인 것이다.


나는 여태껏 내 취향은 nerd(똑똑한데 사회성 떨어지는 괴짜) 쪽이라 생각했는데 꿈에서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근육질의 꽃미남을 선택했다. 나도 참 전형적이구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여주와 남주가 준비(?) 되었고 스토리만 있으면 됐다. 그런데 스토리를 떠올리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꿈을 멈춰놓고 고민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럴듯한 내용을 제공하지 못하니 무의식이 보다 못해 나를 억지로 뛰게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미친 듯이 뛰었다. 눈이 덮인 땅이었는데 피부로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나는 스토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감탄했다. 대부분의 꿈에서 나는 잘 뛰지 못했다. 마치 모래밭 위에서 쌀 한가마를 둘러메고 뛰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진하려고 힘을 줘도 걷는 것보다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처럼 이렇게 몸이 가벼운 적이 없었다. 흡사 내가 바람 그 자체였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눈길을 한참을 달렸다. 그러나 다시금 오늘 자각몽에서 내가 꼭 이루어야 할 업적(?)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렸다.


우선 남주의 형상을 오롯이 떠올려보려고 했다. 짙은 갈색 머리, 다부진 어깨, 시원하게 웃는 입매, 장난기 넘치는 눈빛. 선명하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효과는 있었다. 남주와 나는 어떤 어두운 공간에 있었다. 집 같았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구조였다. 벽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었다. 스토리는 모르겠고 나는 우선 우리가 어떻게든 침대 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야, 뭐야 ///_/// 침대 뭔데~)


자각몽의 특이한 점을 하나 깨닫게 되었다. 자각의 정도랄까? 자각의 밀도랄까? 그게 항상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내가 이 꿈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자각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눈 앞에 남편이 있었다. 아까 그 꽃미남은 어디로 간 것일까. 꿈에서조차 이성을 잃지 못하는 나의 굳은 심지(?)에 감탄했다. (혹은 개탄을 했던가...) 그런데 남편과 나는 싸우고 있었다. 하아... 오늘 내 꿈의 테마는 로맨스란 말이다!!!! 왜 싸우고 있엉ㅋㅋㅋ


자각이 돌아오고 싸움의 내용을 들어보니 아이 가지는 문제로 스트레스받은 내가 아이 안 갖겠다고 으름짱을 놓고 있었다. 최근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갖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최대한 쏟자고 동의한 바 있다. 근데 왜 이런 꿈을 꾼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꿈속의 나는 매우 격한 감정에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어서 이 여주를 달래서 오늘의 목적을 이뤄야 했다. 서둘러 꿈속 이 상황을 정리해야지 결심한 순간!!!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남편이었다.

"자기야, 악몽 꿨어? 왜 이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나는 대답 대신 남편의 통통한 엉덩이를 콩, 하고 때렸다.

"ㅋㅋㅋㅋㅋ뭐야~ 자기가 자꾸 낑낑대면서 인상을 쓰길래 깨웠어."

남편에게 '자기가 깨우는 바람에 내 원대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입술을 쭉 내밀고는 "여보랑 싸웠따-" 하고 새초롬하게 말했다.

"파이터야 뭐야 ㅋㅋㅋ 왜 맨날 꿈에서 나랑 싸우는 건데"

그러고 보니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랑 싸우는 꿈이 차지하는 지분이 꽤나 크다. 현실에서 맞짱 떠야 하는데 참으니까 꿈에서 푸나보다. 내가 이렇게 참고 사는 걸 알기는 하는 건지 우리 순박한 남편은 내가 마냥 좋단다. 출근을 위해 씻으러 가는 남편을 힐끔 보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내 자각몽을 꿨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면서 잠에서 깼다. 근데 잠에서 깬 것도 꿈이었다. 그 꿈에서 또다시 깼는데 그것도 꿈이었다. 꿈속 로맨스고 뭐고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되어 100년 동안 못 깨어나는 건 아닌가 무서웠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사라지고 깨도 깨도 꿈 속이었던 꿈을 오조오억 번 정도 꾼 후에야 비로소 진짜 현실 세계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도 오조오억 배인 아침이었다.


그다음 자각몽은 몇 달 후에 나를 찾아 올 지 모르겠다. 그 날을 위해 세심하게 짜인 스토리를 하나 마련해 두는 것으로 오늘의 아쉬움을 달래야겠다. 과연, 준비된 시나리오가 자각몽 세계에서의 로맨스를 성공적으로 이루게 해 줄 것인가... 다음 기회에 밝혀지겠지!


어릴 적 치토스 선전의 유명한 마지막 멘트를 패러디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치토스~ 언젠간 먹고 말거야!"



"언젠가 꼭 꾸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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