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0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자꾸 망각한다.
2040년 1월 1일. 나는 새해 소원을 브런치에 쓰기 위해 컴퓨터에 앉았다. 브런치 글을 처음 쓰던 20년 전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이렇게 오랫동안 글을 쓸지 몰랐는데... 컴퓨터 책상 위에 올려 둔 작은 탁상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크게 변한 게 없는 줄 알았는데 눈꺼풀은 점점 내려와 고양이 같던 눈이 영락없는 삽살개처럼 보였다. 기미와 주근깨 그리고 주름. 이 지긋지긋한 시간의 얼룩만 지운다면 다시 젊어질 수 있을까? 아무리 요즘 평균 수명이 120세가 넘는다지만 나는 이미 내 인생의 반은 건너온 기분이 들었다. 30대가 되면 삶의 방향이 확실해 질거라 믿었던 철없던 시절을 지나 이젠 인생에 바라는 것도, 큰 기대도 없는 50대가 되었다. 닥치는 대로 노력한 덕택에 삶의 풍요로움은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던 아이에 대한 미련은 이제 스쳐 지나간 첫사랑처럼 아득해졌다.
글을 쓰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 찰나의 순간. 나는 눈을 감고 바랐다.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두 손은 키보드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요새도 아날로그 키보드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분명 방금 전까지도 내 손은 가상 키보드 위에 있었다. 게다가 어쩐지 아날로그 키보드에 올려져 있는 내 손이 더 탄력 있고 매끈해진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잠시 눈을 감은 사이에 과거로라도 돌아온 것처럼.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서둘러 탁상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사진으로만 기억하던 그 그리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볼은 적당히 통통하고, 입가에 주름도 없다. 하, 이럴 순 없다.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고 마켓에서 득템 했다며 아끼고 아끼던 자개장, 아파트 주차장에서 낑낑대며 가져온 버려진 소파, 셀프 인테리어를 해보겠다고 혼자서 엉터리로 만든 좌식 테이블. 이럴 수가. 남편과 내가 처음 얻었던 우리의 신혼집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시공간'을 초월한 것이다.
컴퓨터 우측 하단 바에 떠있는 숫자가 보였다. 2020년 1월 1일.
나는 무려 20년을 거슬러 올라왔다. 꿈은 확실히 아니었다. 물론 꿈에서도 나는 항상 '이건 꿈이 아니야'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이게 현실이라는 명확한 체감이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난 정말로 클리셰한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과거로 온 것이다. 나는 과거로 돌아오면 그저 신기하고 믿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내가 과거로 돌아오니 믿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이건 리얼이다.
컴퓨터 앞에 앉은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일어나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앉아서 이 상황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을 다 했다. 나에게 벌어진 이 엄청난 행운에 전율하는 동시에 배은망덕하게도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계획된 과거 여행이 아니라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다. 전날 코스피와 코스닥 차트를 보고 왔어야 하는데... 주식에 관심을 끊은 지 오래다. 그래도 이제 어느 동네 아파트를 사둬야 하는지는 명확하게 알고 있으니 안심이었다. 20년 전의 젊음을 얻은 이 순간에 제일 먼저 한다는 생각이 이런 것이라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도저히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김에 쓰려던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미 모니터 화면에는 2020년 1월 1일에 내가 쓰고 있던 글이 띄워있었다. 글의 제목은 '불면의 새해'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글을 이었다.
방금 커서가 깜박이는 빈칸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 꽤 마음에 드는 목표가 떠올랐다.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처사가 아니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입은 좀 근질거리고 말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순간들이 오겠지만 나는 이 행운을 나 혼자 몰래 음미하기로 했다.
2020년은 뭔가 화성에도 인간들이 이주해서 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해니까 '2040년에 타임머신을 타고 온 내가 과거로 여행 와서 1년 살다가는 기분으로 살기' 어떨까.
물론 이 정도로 은근하게 비밀을 발설하는 정도는 괜찮겠지. 글에 쓴 그대로 나는 이 기적 같은 일을 그저 가벼운 '여행'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호들갑 떨지도 않고 쿨하게. 사실 내가 흥분하고 여기에 집착하는 순간 다시 미래, 아니 나의 현재로 돌아가버릴까 겁이 났다.
젊어진 남편을 보는 것도 꽤 기분이 이상했다. 젊어졌으니 마냥 좋겠구나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 부부 사이에 아이는 없었지만 꼭 내 아들 보는 기분이 든달까. 아무리 20년 전이라도 30대인 남편인데, 지금 내 눈에는 애기처럼 보이니 큰일이다. 이왕 이렇게 과거로 돌아온 겸 나중에 고생하지 않게 혈압 관리나 지금부터 꾸준히 해줘야겠다.
과거로 돌아온 첫 일주일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소식이 끊겼던 인연들, 나를 알아보는 엄마, 수술하기 전의 아빠, 아직 코흘리개인 조카, 이민을 떠나기 전인 언니네 부부. 소중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부둥켜 안거나 호들갑 떨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꽤 애를 먹었다.
2주쯤 지났을 때 남편이랑 첫 싸움을 했다. 나는 내가 과거로 돌아왔기 때문에 남편과 절대로 다시 싸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건강을 챙겨주겠다며 준비한 즙을 쓰다며 죽어도 안 마시겠다는 남편을 보자 '어쩜 이 인간은 변하질 않지?' 하며 울화가 치밀었다. 그 앳된 얼굴에서 20년 후 고집불통 영감탱이의 얼굴이 오버랩되자 뚜껑이 열린 것이다. "자기 이러다가 나중에 큰일 난다니까!"하고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하는 그의 태평함에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진짜 내가 다 알고 하는 소리라니까!
싸우고 났더니 20년 전으로 타임 워프를 했든 어쨌든 인생이 다 부질없는 것 같고 우울했다. 나는 그다지 현명해진 것 같지도 않고, 너그러워진 것 같지도 않다. 남편이 너무 얄미운데 또 걱정되고, 자존심에 화해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런 괴로운 감정 상태를 견디고 있는 것이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 지지고 볶으며 또 20년 살 거였으면 그냥 돌아오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하루를 넘기지 않고 화해를 했다. 남편이 걱정해주는 마음을 몰라주고 고집 피워 미안하다고 넙죽 절을 했기 때문이다. 아까 남긴 즙을 내 앞에서 박력 있게 마시고 나서 칭찬받고 싶어서 꼬리 흔드는 강아지 마냥 알짱거렸다. 어휴, 내가 미쳐. 이 영감탱이 레퍼토리는 어쩜 이렇게 타임리스냐.
3주쯤 지나니까 종종 내가 원래는 56살이었다는 사실을 까먹었다. 오히려 내가 살다가 온 그 2040년까지의 삶이 지독하게 긴 꿈이었나 싶기까지 했다. 그나마 남편 몰래 모아 둔 비상금으로 20년 후 금싸라기 땅으로 변할 땅을 사둔 게 내가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유일한 증거였다. 열심히 운동하고, 공부하고, 요리하고, 사랑하리라 결심했는데 정신만 차려보면 텔레비전 앞에서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정주행 중이었다.
4주쯤 지나니... 나는 기적의 논리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나는 그리웠던 이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다시 느껴보는 중이라나 뭐라나.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20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자꾸 망각한다. 인생 2회 차가 이럴 리가 없는데! 매일매일이 의미 있고 소중해야 하는데!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다시 56살의 나로 복귀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설거지도 귀찮고, 요리하기도 싫고, 그냥 뜨듯한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 넷플릭스나 보고 싶다.
결론적으로 인생 몇 회차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현재를 잘 사는 놈이, 과거도 잘 살고, 미래도 잘 사는 법이다.
뭐, 이 말도 알아들을 놈만 알아듣겠지.
아무튼 내가 꼰대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내가 다 알고 하는 소리라니까?
illustrated by Lee, mal-nyun
20년 전으로 돌아와 한 달 살아 본 후기 끄-읕!
(나를 믿지 못하신다면... 여기 증거가!! ㅋㅋ 믿거나 말거나)
https://brunch.co.kr/@bigchohee/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