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자 공원에 나가 걸을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토요일이라 남편도 쉬는 터라 "같이 운동 가자!"라고 명랑하게 말했다. 이 좋은 걸 나만 할 수 없지! 하지만 짧은 찰나에 남편 얼굴에 스치는 귀찮은 표정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남편은 다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그래, 같이 나가자"라고 했다.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나갈 채비를 하는데 혼자일 때는 후다닥 준비가 끝났는데 두 사람일 때는 준비 시간이 두 배로 길어졌다. 그래도 일찍 일어난 덕분에 아침 8시 반에 공원으로 나설 수 있었다.
우리 부부에게 자전거가 한 대 밖에 없어서 내가 자전거를 타고, 남편이 걸어서 가기로 했다. 천천히 페달을 밟아도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는 빠르기 때문에 종종 그를 기다리기 위해서 멈춰 섰다. 공원까지 가는 시간도 평소 혼자 나올 때보다 많이 걸렸지만 함께라서 즐거웠다.
2020.04.18 매일걷기 5일차_ 남편과 함께
나의 루틴대로 지정 장소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본격적으로 걷기에 앞서 무선 이어폰을 나 하나, 남편에게 하나 건넸다. 남편이 "뭐 듣게?"라고 묻기에 "응, 팟캐스트"라고 말하며 "우리 같이 들으면서 걷자!"라고 말했다. 남편은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아... 난 듣기 싫은데?"라고 말했다. 참 솔직한 남편. 내가 즐기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함께하고 싶은 욕심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내 손에서 이어폰을 뺏어서 자신의 귀에 꽂는 남편. 답정너라고 나를 욕해도 할 수 없다. 가끔은 그냥 토 달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쁘게 같이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거 되게 유익한 방송이란 말이야 ㅠㅠ)
남편이랑 운동을 같이 나오니 나의 신경은 온통 남편에게 가있다. 평소 걸을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감상하며 관찰하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그가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건 아닐까, 그가 걷기 운동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운동을 하러 나온 건데 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껄렁하게 걷는 걸까, 이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걷는 걸까 등등등 남편 생각으로 꽉 찼다.
내가 운동을 하러 나온 건지 남편 눈치 보러 나온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오랜 경험을 통해서 사람은 본인이 스스로 느끼기 전까지 남이 뭐라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맨날 건강이 최고다, 밥 잘 챙겨 먹어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엄마가 잔소리를 했었지만 내가 아프기 전까지 귓등으로도 안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남편도 내가 며칠 동안 걷기 운동하니 참 좋더라 매일 말했지만 운동을 하러 나와서도 본인 의지로 나온 게 아니라 그런지 눈에 영 생기가 없다.
오케이, 여기까지.
나는 일단 남편을 호숫가로 끌고 나왔고, 물을 마시고 안 마시고는 전적으로 그의 몫이다. 마침 팟캐스트의 한 에피소드가 끝나서 자연스레 이어폰을 넘겨받고 내 페이스대로 걷기 시작했다.
남편은 두통이 있다고 해서 잠시 쉬면서 나를 기다리기로 했다. 회사 스트레스로 툭하며 자주 아픈 남편이 걱정된다. 그럴 때일수록 운동을 하며 컨디션을 올려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은 눈치다. 그는 퇴사한다고 말은 했는데 회사에서 잡으니 더 난처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다. 나는 이왕 퇴사를 결심했으면 그냥 남들 신경 쓰지 말고 밀어붙이라고 했다. 어서 퇴사를 해서 잠시라도 아무런 걱정과 스트레스 없이 순수하게 행복해하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다.
역시 나의 속도대로 걸으니 한결 운동하는 느낌이 났다. 몸의 감각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걷기 운동 5일의 역사 중에 가장 날씨가 좋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과 쨍하게 내리쬐는 햇살 덕분에 공원에 있는 모든 것들이 찬란하게 빛났다. 눈에 담긴 풍경을 하나하나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량한 하늘!!!
이마에 카메라라도 달고 걷고 싶었다. 내가 눈을 두 번 깜박이면 사진이 자동으로 찍혔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마음껏 걸으면서 아름다운 풍경도 실컷 담을 수 있을 텐데!
남편이랑 같이 와서인지 공원 한 바퀴나 두 바퀴째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장신호가 감감무소식이다. 조금 서운해지려는 찰나에 아주 약하지만 신호가 왔다. 세 바퀴째였고, 이 정도 신호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한 바퀴를 더 돌고 가야지 마음먹었다. 마지막 네 바퀴를 돌고 나니 신호가 조금 더 강해졌지만 평소만 못했다. 다른 날들과 다른 변수는 남편밖에 없는데... 흠. 그래도 오늘도, 화장실, 성공적.(ㅋㅋ)
어제보다 많이 걷고 싶었으나 오늘은 총 7,429를 걸었다. 어제와 비교해서 약 1,000 보 정도 적지만 오늘의 특수성도 있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기다려준 남편과 만나 사이좋게 집으로 돌아갔다.
운동을 둘이 하면 마냥 더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둘이라고 꼭 더 좋은 건 아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남편이 "그래도 오늘 걸으니 찌뿌둥하던 게 좀 풀린 것 같아"라며 긍정적인 감상을 말했다. 내일, 혹은 다음 주말에도 나를 따라나설지는 미지수지만 꼭 걷기 운동이 아니더라도 남편도 자신에게 꼭 맞는 좋은 운동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귀찮음을 뚫고 함께 나와주어 기뻤다! 내일은 굳이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나 혼자 다녀올게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