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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PD 빅대디 Jul 19. 2024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용소골의 봄

인간극장을 제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방송가에서 흔히들 ‘헌팅’이라고 부르는 주인공 탐색부터입니다. 많은 시청자분들이 보내주시는 제보를 살펴보기도 하고, 지역 민방이나 지역 신문에 나온 기사나 짧은 스토리들을 뒤져보기도 합니다. 정말 어쩔 때는 어떤 키워드를 두고 지역의 이장님들에게 수소문을 해보는 방식으로도 취재를 하죠. 다양한 방법으로 리스트업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들과 피디들이 둘러앉아 회의를 하고, 그중에 몇을 골라 직접 만나러 전국 방방곡곡으로 떠나봅니다. 방송에 나가지 않더라도 그래서 취재 노트만 남겨져 있는 수많은 잠재적인 인간극장의 주인공들이 굉장히 많았죠. 오늘의 주인공은 매우 급한 시간 속에서 그 숨겨진 이야기 속에서 찾아냈던 분입니다.


이 인간극장 텀을 진행하게 되었을 당시에 제 아내의 뱃속에는 아이가 생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육아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서울 안에 네 쌍둥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집을 발견했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돌보며 출퇴근을 할 수 있고, 육아 선배의 노하우를 고스란히 보고 배울 수 있겠다 싶어 냉큼 달려가 한번 만나 뵙고 바로 다음날부터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저는 그때까지는 육아를 해보지는 않아서 한 가지 변수를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의 낯가림! 당시 네 쌍둥이들은 14개월 정도 되는 나이였어요. 이제 와서는 확실히 알고 있지만, 딱 이 시기의 아이들이 낯가림이 한창인 나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그날 밤 출연자분께 장문의 문자가 왔습니다. 아이들의 시간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어서 수락은 했지만 하루 촬영을 해보니,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인들이 갖는 스트레스도 너무 많다는 거였습니다. 한번 딱 설득해 보고 마음이 바뀌시지 않겠다 싶어 부랴부랴 새로운 이야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남겨졌던 취재 노트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6번째 인간극장 <용소골의 봄>

그러다 작가님 눈에 들어온 한 후보. 경남 의령에서 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딸부잣집이었습니다. 그 옛날 딸만 잔뜩 낳았다는 이유로 괄시를 당하고 사셨던 할머니가 지금은 딸들 때문에 너무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한반도 남쪽 끝에 있는 동네이니 봄이 오는 모습을 좀 더 이르게 담아 올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함께 안고 경남 의령으로 향했습니다. 마을 안으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 언덕 위로 또 올라가면 보이던 집, 집 앞에 있는 좁고 긴 마당에 서서 보면 아래 있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집이었습니다. 그 마당에서 늦은 함박눈도, 이르게 찾아온 봄꽃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던 촬영이었습니다. 이야기를 찾아내는 데에는 고민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비우고, 호흡을 가다듬던 시간은 너무나 기억에 남습니다.


딸부잣집의 어머니, 정인수 할머니는 굉장히 흥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밭에 가셔서도 노래를 늘 흥얼거리셨고, 용돈 내기 고스톱이라도 치게 되면 할머니 특유의 텐션이 폭발했었죠. 취재되었던 내용처럼 함께 사는 딸들과 웃음이 가득한 날들을 보내고 계셨어요. 그런데 예전 시절에는 딸만 낳았다는 이유로 굉장히 호된 시집살이를 하셨다고 말씀하실 때면 그때로 돌아가신 것처럼 시무룩해주시는 할머니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오래도록 내려온 훌륭한 전통들도 많지만, 남아선호 같은 것은 정말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전통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딸들도 그 호된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함께 보고 자라면서 많은 자격지심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특히나 넷째 딸 윤돌님은 자기 다음에는 아들을 낳으라고 이런 남자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개명할 생각도 한 때는 했었다고 말을 하시더라고요. 그 시절 아들을 낳지 못한 할머니는 늘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며 사셨죠. 마치 겨울처럼요.

딸만 낳아서 남몰래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던 정인수 할머니와 이름마저 다음에는 아들을 원하는 마음을 담아 남자 이름처럼 지어졌다는 따님들.

농원 주변에는 겨우내 굳었던 땅을 뚫고 봄나물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하나둘 꽃봉오리들도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봄이 왔네’ 하며 봄의 기운을 느끼며 즐거워하는 가족들을 보며 꼭 이 가족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시절, 고되고 어려웠던 시집살이가 할머니 인생에 겨울이었다면, 지금 딸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는 시간들이 어쩌면 겨울이 지난 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의 곁을 내어주며 함께 사는 딸들이 있고, 농원을 이어가겠다고 나선 손자가 있고, 그래서 노래가 흥얼흥얼 끊이지 않는 인수 할머니의 삶은 지금이 봄일 수 있겠다 싶었던 거죠.

추운 겨울을 지나 따스한 봄이 오는 용소골의 모습을 담았던 촬영 현장

집 바로 뒤편에 위치한 매실 밭에도 꽃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꽃차를 끓여야겠다며 꽃 일부를 따서 집에 돌아간 윤돌님은 하얗고 예쁜 매화가 띄워진 꽃차를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가 다 매화로 가득하면 진짜 예쁜데...
꼭 그때 보러 와야 돼요~


그 이후 용소골을 다시 가보지는 못했지만, 여의도에 일이 있어 찾아오신 윤돌 님을 만났던 날이 생각납니다. 특유의 에너지와 밝음이 여전하시던, 그날도 새로운 뭔가를 배우러 먼 서울까지 올라오셨던 그 모습이 생생하네요. 용소골은 갑작스레 변경되어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한겨울 추위처럼 꽁꽁 언 마음을 가지고 갔던 저에게도 봄날의 따스함을 전해준 가족들을 만난 따뜻한 봄의 기억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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