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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PD 빅대디 Jul 26. 2024

마지막 인간극장

난 그대의 연예인

아내의 배 속에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어느덧 임신 주차가 30주를 넘어서던 시기에 들어서던 때라 이번에 맡을 인간극장을 마지막으로 팀을 옮겨야 할 것 같다고 회사에 말씀드려 놓았던 상황. 다시 인간극장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에 마지막 인간극장이 될 수 있는 편이다 보니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전국으로 헌팅을 다녔죠. 개인적인 마지막 인간극장의 주인공을 찾아서!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전국노래자랑 정읍편에 나와서 오두방정 댄스와 함께 노래를 불러 송해 선생님의 관심을 끌어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mbc 공채 개그맨이었다가 아버지의 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류대은 씨의 이야기가 짧게 방송에 탔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들 아리까리하다고 말했지만 저는 왠지 느낌이 좋아서 가보겠다고 말하고 정읍으로 달려가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대은씨네 가족 사진과 밭에서 잠시 쉬는 가족들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찍은 한 컷

작고 귀여운 가족들 사이에 키가 꽤 큰 며느리감이 함께 있었고, 그 그림 자체가 저는 눈길이 갔습니다. 거기에 개그맨이었던 아들보다 더 입담이 좋은 어머니까지. 개그맨 출신으로 연예인 활동을 하다가 아버지의 병환으로 귀향한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에 가족들의 캐릭터를 확인했기 때문에 방송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획안까지 직접 써서 부장님에게 찾아갔습니다. 뭔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한마디 하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촉이 왔다는 거지?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습니다. 그러면서 피디가 촉이 왔다면 가는 거지 뭐 하시고는 다녀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감독님과 함께 현장으로 내려가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대은 씨는 개그맨을 하던 시절에 이름을 날린 개그맨은 아니었습니다. 주로 개그 프로그램에서 주인공들이 웃길 수 있게 받쳐주는 역할을 하던 개그맨이었어요. 그래도 <롤러코스터>에 나왔던 걸 기억하는 분들이 꽤 많이 있기도 했고, 정준하, 박영진 같은 선배들의 눈에 들기도 했던 가능성을 보이던, 하지만 아직은 무명인 개그맨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슬럼프가 찾아와 잠시 머리를 좀 식힐 겸 내려갔던 고향집에서 아버지의 질병을 마주하게 된 거죠. 그렇게 고향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결국엔 아예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죠. 함께 촬영을 하면서 서울에 올라와 직접 이야기를 못했던 선배들을 만나 이제 완전히 귀농해 살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얼굴을 보며 전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말 그대로 개그맨 유대은에게 완전한 안녕을 고한 것이었죠. 아쉬운 얼굴 너머로 후련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내 주변 사람들을, 내 가족들을 웃게 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결단을 하게 됐죠.

시간을 내어 출연해주신 정준하 씨와 함께!

일상은 상당히 단순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소 밥 주고 오고, 하루 종일 밭에 있다가 저녁에 다 같이 둘러앉아 TV를 보거나 수다를 떠는 매일의 일상. 그래도 며느리가 해주는 월남쌈도 먹어 보고, 주말에 일 도우러 온 형 내외와 함께 농사일도 하고, 손두부도 만들어 먹고, 항상 같은 일상도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른 구석이 있어 하나하나 촬영을 했다. 그리고 각각의 캐릭터들이 유쾌한 바이브를 쏟아내는 이 가족은 피디인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인간극장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거기에 심심하지 말라고 송아지도 태어나주고, 강아지도 태어나주고, 감사한 일들이 계속되었죠. 촬영 감독님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가족들이랑 짜고 했던 깜짝 카메라는 덤이었고요 :)

촬영 감독님께 깜짝 이벤트 해드리고 나서! 대은 부부 ♥

대은 씨는 이번 인간극장을 함께 찍으며 여러 가지를 스스로 결단해 주었습니다. 선배들을 만나 이야기도 하겠다고 해줬고, 프러포즈도, 혼인신고도 함께 해줬죠. 덕분에 5부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끌어갈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인간극장은 출연자들의 도움과 결심, 스스로 꺼내놓는 깊은 이야기와 아이디어들로 채워지는 것 같아요.


서두에 언급했던 뱃속의 아가는 딱 5부 편집까지 기다려주고 5부 더빙하는 날 태어났습니다. 내레이션 녹음은 팀장님께 부탁드리고 저는 분만실에 있었어요. 대은 씨네 집에서 느꼈던 계속되는 출산의 기쁨이 저희 집에 이어졌죠. 정말 계속 밤새다가 하루 쪼끔 자고 그 다음날 아내의 진통으로 밤을 또 꼴딱 새우고 비몽사몽 간에 첫 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 순간의 신비로움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네요. 눈물이 막 터지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한 번도 느껴보지도 못했고, 표현할 수도 없는 깊고 크고 넓은 감정이었어요.

5부 편집할 때까지 기다려 준 고마운 딸 :)

한해 뒤에는 대은 씨네 늦은 결혼식이 있었고, 그리고 전후가 기억나진 않지만, 대은 씨 아버님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경조사 모두로 대은 씨 가족들을 다시 만나 보고 SNS를 통해 쌍둥이의 부모가 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해 들었네요. 엄마아빠 골고루 닮은 쌍둥이도 웃는 게 엄청 귀엽더라고요. 가족들의 개그맨이 되기로 결심한 대은 씨네 가족은 여전히 정읍에서 깔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살고 있지 않을까요?


혹시나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


인간극장 <난 그대의 연예인> 1부 다시 보기

https://youtu.be/9mI1n-9r65U?si=CvCzOH4I0UEhorP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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