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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창 신부범 Mar 26. 2019

10여 년째 투병 중인 엄마, 갈 곳도 마땅치 않다.

요양병원도 꺼리게 된 엄마 아닌지, 10여 년 전 그날의 엄마를 생각하니

엊그제 엄마가 입원해 계신 대학병원의 주치의께서 "엄마가 퇴원하게 되면 어디로 모실 거예요?"라고 했다. 엄마의 현재 몸상태로는 "퇴원을 한다 해도 집으로 모실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적 사정을 주치의께서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요양병원으로 갈 예정이라고 하니 우선 "그 병원에 병실이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다"라고 했다.


먼저 엄마가 10여 년째 계셨던 서울의 모 요양병원에 전화 문의를 했다. 엄마가 조만간 퇴원할 예정인데 "그곳으로 모시고 가도 되느냐"라고 물었다. 상담실장은 현재 병실이 다 찼으니 "지금 당장은 힘들겠다"라는 말과 함께 "다른 요양병원을 알아보는 게 어떻게냐"라고 했다. 매년마다 이런 일은 있었고 그때마다 병실이 없지는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의외의 답변이라 다소 당황스러웠다.


엄마가 지금까지 줄곳 계셨던 그곳 요양병원은 건강보험심사평가에서도 1등급 판정을 받았다. 환자를 잘 관리하고 치료를 잘해서인지 보호자들의 평판도 좋아 서울시내에서 꽤 알려진 병원이다. 그런 만큼 "그곳 요양병원에 입원하려는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을 수 있다"라는 생각에 상담실장의 이 같은 답변을 액면 그대로 믿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 요양병원에서도 이제 "엄마를 관리하고 치료하는데 지쳤나 보구나?" 하는 괜한 의구심이 들었다. 현재 "엄마의 현재 몸상태로 보아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심증적 생각이 작용한 때문이다. 그럴 것이 올해로 뇌경색 투병생활 10여 년째인 엄마는 일반 다른 환자와는 차원이 다른 몸상태를 지니고 있는 중이다.


오랜 투병생활로 뼈만 앙상이 남은 엄마의 몸을 굳을 대로 굳어있어 욕창방지를 위한 체위변경도 쉽지가 않는 상태다. 이미 여기저기 생겨난 욕창에 드레싱 소독은 일상화된 지 오래다. 언젠가부터 온몸으로 번진 피부질환은 연고를 수시로 발라 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신경 쓰고 돌봐야 할 곳이 한 두 군데도 아닌 게 우리 엄마다.


뿐만 아니라 투병생활이 길어지고 연세가 많아질수록 툭하면 체온이 오르내림을 반복하기도 한다. 때론 염증 수치도 기준치 이상의 소견을 보이기도 해 피검사를 통한 항생제 투여를 고민할 때도 많다.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는 일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엄마를 간호하고 치료하는데 일반 다른 환자와는 비교대상이 아니게 된 것이다.


거기에 증상이 악화되고 상태가 위급상황이 오게 되면 보호자에게 연락은 두말할 것도 없고, 대학병원 응급실 사정도 알아봐야 하고, 소견서 발부에 퇴원수속, 대학병원에서 엄마가 호전되어 요양병원 재입원 시 엄마 상태에 맞는 병실 재지정 등 수없이 반복된 다람쥐 채 바뀌 절차에 그곳 요양병원도 엄마에게 이제 이골이 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환자를 위한 병원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요양병원 측의 사정도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설사 "병실이 남아있어도 엄마를 받아들이기 곤란해 병실이 없다"라고 거짓말을 한들, 그 요양병원 측에 뭐라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뇌경색 투병 10여 년째의 우리 엄마의 몸 상태다.


그래서 그곳 요양병원 말고 또 다른 요양병원에 입원절차상 필요한 소견서를 보내고 전화 문의를 해보면 이런 엄마의 몸상태가 소견서에 고스란히 나열되어 있어서 인지 몰라도 몇 군데의 요양병원에 입원 상담을 받아봤지만 "엄마가 입원할 병실이 지금은 없네요?"라는 아쉬운 답변만 돌아 온곤 했다.


어디까지나 추측, 또 추측이긴 하지만 우리 엄마는 이제 요양병원마저도 꺼리게 된 몸상태가 된 것은 아닐까란 생각마저 들 정도다. 엄마가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호전이 되어 퇴원을 하게 되어도 이래 저래 걱정이 되어버린 우리 엄마, 오늘따라 뇌경색 발병 전 그날의 엄마가 더욱더 생각이나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온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본격적인 농사철을 앞둔 딱 이 시점이다. 농사일이 '바쁘면 올라오고 싶어도 못 온다" 하시면서 저 멀리 전라도 영암에서 인천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셨던 우리 엄마, 도시에서 사서 먹으려면 "다 돈이다"라며 배낭 가득 각종 농산물을 가져오신 우리 엄마,


그 날 저녁 가져온 농산물로 밥반찬을 손수 만들어 밥상을 차리시며 '아들~ 밥 먹거라'하시며 평소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한 못난 아들밖에 몰라던 우리 엄마가 오늘날 왜 이런 상태까지 되고 말았는지 가슴속 차오르는 울컥함을 참고 또 참아 보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음에 나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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