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 중에서도 이용객이 많기로 소문이 난 신도림역, 1호선, 2호선의 환승구간이며, 배차간격도 짧아 수분간격으로 지하철이 오고 가는, 그래서 퇴근길 신도림역은 지하철을 타려는 승객들의 줄은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띠르룽띠르룽~'띠르룽띠르룽~"
지하철이 역내로 진입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곧이어 동인천행 급행열차가 미끄러지듯 스르르 멈춰 선다. 출입문이 열리기 무섭게 줄을 서서 기다리던 승객들이 우르르 승차한다. 하지만 승객들이 반도 타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그만 타세요? '밀지 마세요?'라는 볼멘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신도림역 도착하기 전 열차 객실은 승객들로 이미 초만원, 아무리 용을 써 밀어 넣어 보려 해도 그 많은 승객들을 태우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미쳐 타지 못한 승객들이 밀고서라도 무리하게 타보려는 데서 나온 신음에 가까운 소리다.
이렇듯 퇴근길 지하철은 시루에 콩나물 들어서듯 승객들로 차곡차곡 쌓이고 만다. '옴짝달싹' 못하는 승객들은 그저 전동차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승객 개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관성의 법칙만 적용되는 지옥철이다.
따라서 지옥철에서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밀수도 있고, 밀릴 수도 있다. 누군가의 어깨를 칠 수 있고, 치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신발도 밟을 수 있고, 밟힐 수도 있다. 그래서 승객들끼리 간혹 밀고, 치고, 밟는 문제로 '옥신각신' 언성을 높이기도 하는 게 지하철 퇴근길의 처절한 삶이기도 하다.
이런 퇴근길 지옥철의 일상은 지난주 금요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 날 나는 남들보다 조금 서둘러 뛴 노력 덕분인지 열차에 간신히 몸을 싣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내 몸은 객실 출입구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거의 떠밀려 짐짝 취급이 된 내 몸의 자세가 올바를 수 없었다. 어정쩡한 몸을 곧추 세우기 위해서라도 어디 움직일 틈이라도 있지 않을까 주위를 살펴봤다. 그런데 바로 뒤편에 배낭가방(백팩)을 메고 있는 승객의 등과 내 등이 맞대고 있음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가방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도드라 저 나온 부분은 열차가 출발하고 멈춰 설 때마다 승객들이 승하차를 하기 위해 이동할 때마다 나의 등을 톡~톡~건드리는 불편함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나의 참을성에도 임계점을 넘어 폭발점에 다다랐다.
승객들로 가득 찬 퇴근길에 빵빵하게 가득 찬 것도 모자라 불거저 나온 배낭가방을 메고 지하철을 타다니, '도대체 생각이 있는 사람이야 없는 사람이야?' 나의 '짜증 게이지'는 달아오른 객실 분위기만큼이나 치솟았고 그 승객에게 '다짜고짜' 통명스럽게 물었다.
"아저씨 그 가방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 있길래 내 등을 툭~툭~ 건드리고 그래요?"
"죄송합니다. 건축 타일을 붙일 때 쓰이는 도구인데 선반에 올려놓기도 마땅치 않고 정말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유행 따라 멋을 부리자고, 등 뒤로 걸쳐 멜 수 있어 편해서, 양손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어 스마트폰 사용이 용이하다고 메는 가방도 아닌 일할 때 쓰는 연장이 들어 있다는데, 먹고살기 위한 생계용으로 멘 가방이라는 데, 더 이상 무슨 말을 그에게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깨달았다. 복잡한 지하철, 그저 불편함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곱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던 그동안의 나의 단편적인 생각과 사고가 얼마나 편협했었는지를, 그리고 보편적 시각으로 달리해 보니 지하철 배낭가방을 무턱대고 미워할 수만은 없게 됐다.
그리고 생각해 봤다. 지하철의 어느 노동자가 멘 배낭가방에는 삶에 대한 희망이, 어느 학생이 멘 가방에는 미래에 대한 꿈이, 어떤 아주머니가 멘 배낭가방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것을, 10여 년 전 당신보다 큰 배낭가방에 터질 듯 농산물을 가득 담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멀리 남도에서 인천의 아들 곁으로 달려오셨던 우리 엄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