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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지 Dec 30. 2023

가슴에 붙잡고 떠나보내지 못하고

<다시 쓰는 성장일기> by 빅이지

나는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뇌에서 일부러 삭제해 버린 것처럼. 부모님이 헤어지시기 전까지, 나는 우리 집이 세상에서 가장 화목하다고 믿었다. 아빠가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것도 없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매주 금요일은 아빠가 과자를 사 오는 날이었다. 한 번은 아빠가 교통사고가 나 목발을 짚고 다닐 때라, 과자를 사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화를 받고 1층으로 내려가 보니 목발을 잡은 양손에 과자를 한가득 들고 있는 아빠가 서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엄마와 아빠가 싸우기 시작했고, 아빠가 떠난 자리에서 엄마가 우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아빠는 헤어졌다. 나와 동생은 엄마와 함께 살았다. 엄마는 몸이 약해서 따로 일을 하지는 않았고, 우리는 아빠가 주는 생활비에 의존해서 살았다. 사업이라는 게 월급처럼 매달 따박 따박 돈이 들어오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사업이 어려울 때는 몇 달 치 생활비를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필요한 게 있거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아빠한테 바로 연락해서 돈을 받았고, 아빠는 사업이 힘들었을 때에도 나한테는 항상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나는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자랄 수 있었다.  




엄마가 아빠와 헤어진건 내가 초등학교 6학년즈음이었으니까, 엄마 나이 고작 서른셋이었다. 서른셋의 어린 나이에 약한 몸으로 할 줄 아는 거 하나 없이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했을 때, 엄마는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을까?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철이 들었었더라면, 엄마의 아픈 상처를 잘 보듬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 시절 나는 오히려 나와 상황이 비슷했던 친구들과 어울리며 방황했고, 엄마를 더 힘들게 했다. 한 번은 학교에 반항하는 글을 썼다가 엄마가 학교에 불려 왔는데, 선생님께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사정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결심했다. 불쌍한 우리 엄마 다시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고개 숙이지 하지 않겠다고.


빨리 성공해서, 엄마를 잘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어렸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엄마는 자주 아팠다. 병원에서도 딱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 속 시원하게 진단을 내려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엄마가 아플 때마다 나는 눈물이 나는 걸 꾹 참으며 엄마의 뜨거운 이마에 수건을 올려주고,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중국으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유학을 떠나던 날, 엄마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나에게 잘 가라고,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엄마가 괜찮은 것 같아 안심하고 집을 나섰다. 몇분 뒤 두고 온 물건이 있어 현관문을 다시 들어섰을 때, 거실 바닥에 주져 앉아 걸레를 훔치며 울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    


나는 그렇게 중국으로 떠났고, 엄마한테는 미안했지만 솔직히 마음은 조금 편했다. 더 이상 아픈 엄마를 옆에서 보면서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니까. 전화도 자주 하지 않았다. 힘이 없는 엄마 목소리 들을 때마다 나만 너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며, 아픈 엄마를 외면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나는 석사를 준비하면서, 인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엄마가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원래도 치아가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발음이 뭉개져 알아듣기 힘들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상태가 심상치 않으니, 엄마가 안 가겠다고 버텨도 이번에는 꼭 모시고 치과에 다녀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며칠 뒤 동생이 울면서 전화를 했다. 엄마가 구강암 4기로 당장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즉시 짐을 싸서 한국에 돌아왔다. 엄마는 천안에 있는 단국대학교 병원 6인실에 입원을 했다. 처음 2개월은 간병인 아주머니가 상주해 계셨고, 동생이 간간히 병원에서 들려 엄마를 돌봤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말에 병원을 갔는데, 엄마는 동생에게 침대를 내어주고, 정작 본인은 보호자용 간의 침대에 누워서 잤다. 옆에 같이 입원해 계시는 아주머니들께 들으니, 엄마가 오히려 동생을 돌보고 있다고 했다. 간병인 아주머니를 고용하는 비용도 부담스럽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엄마는 내가 병원에 있어주길 원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엄마와 함께 병원에서 지냈다.  


엄마는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병행했다. 초기 경과는 좋아서 추가 전이 없이 암세포들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워낙 진행이 많이 된 상태라 혀를 절제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자궁에 큰 혹도 발견되어 먼저 혹을 절제하는 수술을 해야 했다. 안 그래도 말랐던 엄마는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수술까지 하게 되니 음식을 잘 넘기지 못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사골 국물에 밥을 말아 믹서기로 갈아서 드렸는데, 나중에는 그마저도 드시지 못했다.


처음에 치료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엄마가 다 나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퇴원을 하면 엄마를 모시고 서울에서 살 생각을 했기에 아빠에게 천안에 있는 집은 처분하자고 했다. 너무 섣부르고 어리석은 결정이었고,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그때 내가 집을 정리하지만 않아더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엄마를 차가운 병원 침대에서 보내지 않았을 텐데. 누구보다 착하고, 순수하고, 정이 많았던 엄마는 끝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2010년 12월 16일, 45세의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장례지도사님 말이 눈을 감겨 드리려고 계속 애를 썼는데, 결국에는 감겨드리지 못했다고 했다. 아마 엄마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남겨진 나와 동생이 걱정되어 편히 눈을 감지 못했나 보다. 장례식을 마치고 서울 자취방으로 돌아온 날, 동생과 나는 엄마가 우리를 따듯하게 안아주는 꿈을 꾸었고, 그렇게 엄마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벌써 10년도 더 지났는데 나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엄마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몇 년 전 엄마가 꿈에 나왔다. 꿈속에서도 엄마는 여전히 아팠고, 나에게 너무 아파서 이제는 그만 떠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내가 아직 엄마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가지 말라고 울며 애원했다. 내가 우는 소리에 놀라 남편이 나를 깨웠고, 나는 꿈에서 깬 후에도 한동안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우리는 잊어버리고 하늘나라에 가서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라고 말하지 못한 나 자신이 미웠다. 그 후로 나는 꿈속에서 다시 한번 엄마를 만나면, 이제는 그만 가서 편히 쉬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몇 년이 지나도 엄마는 더 이상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은 엄마의 기일이었다. 기일이 다가오면, 애써 밝게 지내보려고 하지만, 자꾸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난다. 혹여 나와 동생에게 누가 될까 봐 아프다고 말한마디 하지 못하고, 외롭게 살다 간 엄마를 생각하면, 내 욕심에 눈이 멀어, 엄마를 잘 보살피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럽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려, 중국 유학을 가지 않고, 엄마를 모시고 살고 싶다. 만약 그랬더라면, 엄마를 이렇게 가슴에 붙잡고, 뼈저리게 후회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2023년 12월 21일 시카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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