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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지 Dec 18. 2023

시카고에서의 새로운 출발

<다시 쓰는 성장일기> by 빅이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시카고로 이사를 왔다. 원래는 11월 말까지 뉴욕에 있다가 추수감사절이 끝나고 이삿짐 받는 일정에 맞춰 천천히 이사할 예정이었지만, 남편 비행 스케줄도 잡히고, 또 추수감사절 기간에는 비행기표 구하기도 어렵고 해서 일찍 이사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당초 일정보다 빨리 이사를 온 덕분에 새집에는 기본적인 가구는 물론 이불도 없었다. 이삿짐을 받기 전까지 대충 바닥에서 자려고 아마존에서 매트와 침낭을 주문해 두었지만, 침낭이 아닌 에어 매트리스(바람 넣는 도구가 포함되지 않은)가 잘 못 배송이 되는 바람에 딱딱한 바닥에 매트하나 깔고 자야 했다. 급하게 덮고 잘 담요를 주문했지만, 덩치 큰 성인 둘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작은 사이즈인지라 밤 사이 추위로 입 돌아가지 않으려면 타월에 욕실 커튼까지 덮고 자야만 했다.


불편한 잠자리에 새벽에 몇 번씩 깨는 것은 물론이요 식탁과 의자도 없이 주방에 있는 아일랜드 탁자에 기대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사 온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하기를 며칠, 드디어 이삿짐이 들어왔다. 한국에서는 이사 날짜를 내가 원하는 날로 지정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대체로 배송기간(delivery window)을 한 일주일 주고, 실제 배송일은 24-48시간 전에 통보해 준다. 때문에 언제 정확히 짐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그냥 짐이 빨리 오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삿짐을 받고서야 비로소 사람답게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이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왜 매번 고생을 사서 하는지.




이삿짐을 받고 달콤했던 행복도 잠시, 본격적인 쇼핑 전쟁이 시작됐다. 뉴욕에서 정리하고 나올 때 언제 다시 미국에 들어올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삿짐을 최소화했다. 또 뉴욕에서는 방 하나짜리 아파트에 살았는데, 새로 이사한 집은 다목적실 포함 방이 세 개라 생필품은 물론이요 가구도 새로 들여놔야 했다.


미국에 와서야 전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는 중국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이득(?)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품질은 한국보다 훨씬 떨어지는데 가격은 3~4배 비싼 물건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이 돈이면 한국에서는 훨씬 더 좋은 물건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속이 쓰렸다. 어쨌든 우리는 시카고에서 얼마나 살지 모르는 상황이고, 또 미국에서 파는 중저가의 가구들은 어차피 눈에 차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중고로 저렴하게 가구를 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았다.


다행히 Cort Furniture라는 가구 렌털 업체에서 자신들이 렌털해 줬던 가구를 싸게 파는 아웃렛을 발견해서 중고지만 상대적으로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더구나 설치까지 해주는 가구들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보통 가구 조립을 직접 하는데,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가구 설치해 주는 게 얼마나 큰 혜택인지. 더구나 우리는 미국 최대 세일기간인 블랙 프라이데이에 구매해서 추가 25% 할인까지 받았다.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가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보면 블랙 프라이데이 전에 이사를 온 게 신의 한 수가 아니었을까 한다.


당분간은 외벌이고, 가구 사고 나면 경제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아 집을 예쁘게 꾸미는 건 포기하고 있었는데, 막상 가구를 저렴하게 장만하다 보니, 집을 예쁘게 꾸미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남편은 언제 또 이사 갈지 모르니, 최소한의 것만 장만하자고 했지만 나는 하루를 살더라도 예쁘게 잘 꾸며놓고 살고 싶었다. 남편과 결혼한 지 벌써 7년 차인데 계속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그동안 나에게 집은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공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나중에 우리 집 사면 그때 잘해놓고 살자고 했지만,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이 회사 다닐 때는 일한다고 바빠서 집안을 돌보는 데는 신경 쓸 틈이 없었지만 이제는 일도 안 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집만큼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더욱이 나는 안 했으면 안 했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인지라, 이사 오고 거의 2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각종 쇼핑몰에서 블랙 프라이데이 핫딜을 검색하고, 미국의 당근마켓인 Offer Up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싼 가격에 사는데 하루를 온전히 썼다. 남편은 이 정도면 되었다고 이제 그만하라고 말렸지만, 나는 소품 하나하나까지 내 성에 찰 때까지 쇼핑을 멈출 수 없었고, 마침내 남편과 내 취향이 물씬 묻어나는 예쁜 집이 완성되었다. 남편은 그동안 집안일에는 영 관심도 소질도 없는 내게 일하는 것처럼 집안일을 하면 잘할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었는데, 이번일을 계기로 다시는 일하는 것처럼 집안일을 해보라는 권유는 하지 않을 것 같다.




확실히 집을 예쁘게 꾸며놓으니 삶의 질과 만족도가 매우 높아졌고, 집에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졌다. 그간의 집 꾸미기에 보인 광적인 집착과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만 같아 다행이다. 어쨌든 폭풍 같았던 쇼핑 전쟁도 끝났으니, 이제 다시 일상을 회복할 시간이다. 그동안 집 꾸미기에 매몰되어, 올스탑했던 글쓰기도, 운동도, 공부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번 리듬이 깨지니 회복하기 너무 어렵지만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 했으니 욕심내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해나가야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에서의 인생 제2막이 시작된 것 같다. 앞으로 어디서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남편과 함께 지금처럼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길 바라본다.


2023년 12월 10일 시카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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