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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중모색

야간비행

by 곤 Gon

6월 25일 오후 9시 16분, 여주의 청미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나이트클럽이 개장했다. 파트너를 찾기 위해 남한강 어딘가에서 태어난 생명들이 불빛 아래 몸부림을 치고 있다. 나는 그냥 캠핑 와서 굽는 고기의 익힘 정도가 이븐 한 지 보기 위해 램프를 켰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는, 특히 하루살이類 에게는 일생을 걸고 덤벼들 절호의 찬스가 되어버렸다. 이 오밤중에 저 멀리 어둠에서 이 빛 한줄기 보고 그 작은 날개를 팔락이며 여기까지 날아왔을 녀석들을 생각하면 차마 준비해 온 에프킬라를 뿌릴 수 없다.


얼른 상을 정리하고 방충망이 쳐 있는 텐트 안으로 쏙 들어간다. 이들의 수고가 헛것이 될까 배터리가 바닥날 때까지만 이라도 이 밤을 불태우라고 일부러 램프를 켜놓고 들어왔다. 방충망 너머로 녀석들을 보다가 잠에 들었다.


오전 5시 20분. 차갑고 습한 남한강의 입김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얼른 일어나서 커피 한 잔 하고 물안개 드리운 자기를 감상하라고 재촉한다. 어젯밤 켜 두었던 램프는 방전되어 꺼져있었고, 나는 양치를 하며 어젯밤 녀석들의 잔해를 보았다. 정말 하루살이었나 보다. 램프 주변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시신들을 거두었다. 그래. 수고했다.


인생에 어두운 밤을 지날 때에, 흔히들 터널 같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런데 아니다. 터널은 방향이라도 정해져 있어서 끝까지 달리면 터널 밖 밝은 지점과 조우하게 되리라는 보장이 있지만, 진짜 인생이 어두워져서 비탈길을 구르고 어디가 얼마나 다쳤는지, 피가 흐르는지도 보이지 않고, 눈앞에 칡덩굴(葛皮)조차 보이지 않아 잡을 수 없을 때가 분명 있다. 인생에.


이 어두운 밤, 어디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을 때, 나는 그 밤에 무작정 이 하루살이들처럼 빛을 찾아 비행한다. 운이 좋아 빛을 만나 따라가 보면 좋은 인연들을 만나 어찌어찌 살아지기도 한다. 하나 밝은 빛을 분별없이 좇다 보면 어떤 차의 쌍라이트에 묻은 점 하나로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밤눈이 특히 밝은 새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고, 빛이 너무 멀어 팔락거리던 날개가 못 버티고 찢어질 때도 있다. 여러 위험이 도사리지만, 이 야간에 빛을 찾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겁이 나겠지만 날개를 잘 펴고 빛을 향해 비행을 시작해야 한다.


빛이란, 의미이다. 그 빛 아래 가면 내가 보인다. 내가 누구인지 보인다. 나의 존재 의미를 알 수 있다. 빛은 곧 우리의 영혼이 향하는 그 무엇이다. 하루살이가 빛에 끌리듯이 나는 나의 근원에 끌린다. 나를 왜 만들었는지, 나는 무엇인지, 빛 앞에 나아가 진지하게 물어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어둠이다. 왜냐하면 대낮에는 세상에 너무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이 많다. 할 일이 넘쳐나고 너무 바쁘다. 바쁘게 살라고 재촉한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가만히 앉아 고민할 틈을 주지 않는다.


밤이 오면 어떤가? 어둠 속에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때에는 나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스스로에 대해 더듬어 추측하다 보면 왜곡된 경험과 불안들이 자아상을 일그러뜨린다. 그러므로 어둠의 시간만이 나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시간이다. 비로소 어둠이 내리고 굴러 떨어지고 상처 나고 피가 날 때에 촉감으로나마 ‘자의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치 자해를 할 때에 ‘번쩍’하는 찰나의 빛에 살아있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우울증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어둠의 시간을 보냄으로써 자아에 대한 열망이 강하지만, 좌절을 너무 많이 맛보아 빛을 향해 비행할 힘이 없는 상태, 빛을 보기는 원하나, 자아에 대한 열망조차 끊어져 그냥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고자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른 불행한 철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우울증 환우들아! 약 잘 먹고 상담 열심히 받고 날개 활짝 펴서 잘 말리고 같이 다시 날아올라 보자!


반대로 어둠의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때까지 인생을 살았더라도 주어진 시간을 보낸 것이지, 아직 진정한 의미로서 태어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영혼은 없으나 AI처럼 세상에서 탁월하게 살아갈 수는 있다. 그래도 자의식, 자아에 대한 목마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그 목마름을 대체할 만한 그럴듯한 (성공적인)인생목표라든지, 개똥철학 같은 것들을 쥐여주고 이 체제와 사회에 복무하도록 길들인다.


우리는 모두 빛을 좇는 존재로 이 세상에 왔다. 다시 말해 영원성을 좇는 영원한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 존재다. 빛을 좇다 보니 내가 빛에 끌리는 이유가 영혼 때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부딪치고 구를 때에 비로소 ‘자아’가 생겨나고, 이 ‘자아’의 의미는 ‘빛’ 아래에서 밝히 드러난다. 빛을 찾기 위해 우리는 야간비행을 해야 한다. 가짜 빛에 이끌려 엉뚱한 길(사이비라든가)로 갈 수도 있고, 낙망할 수도 있다. 그래서 먼저 빛을 찾아간 이들의 검증된(많은 이들의 보증을 받은) 발자취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성서라든지, 꾸란이라든지, 바가바드기타라든지, 철학 서적이라든지하는 것들은 그런 의미가 있는 발자취이다. 선배들의 발자취를 잘 따라가고, 나만의 길을 개척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의 영혼은 이미 빛 아래에서 의미를 찾고 여유와 행복감 속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일 회로 영원한 효력을 갖는다기보다, 빛 속에 지속적으로 거주해야 한다. 단기기억상실인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인지 아무튼 빛을 찾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더라. 나와 그 빛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적극적인 앎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낮 시간이 맞아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고,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이웃들을 이끌어줄 힘과 동지애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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