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제히 Jun 30. 2024

스트레스의 신체적 징후들

난임 치료 환자를 위한 금지어


갑작스러운 부정맥

 

난임 치료 기간이 길어지면서 내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실패는 스트레스를 부르고 스트레스는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만병의 근원이다(!) 가뜩이나 예민한 나는 난임 치료 기간 동안 예민함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누군가 건드리면 쉽사리 터져버리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나는 불안함을 계획으로 이겨내는 편이다. 계획적으로 움직이기만 하면 모든 일은 해결된다, 라는 신념이 나를 버티게 한다. (그렇다. 나 매우 J다) 하지만 난임 치료는 절대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생리가 언제 시작할지 알 수 없고 따라서 나의 치료 일정을 내가 알 수 없다. 중간에 물혹이 생기거나 자궁 내막이 준비가 안 되서 이식이 미뤄지거나 등등 이벤트가 생기면 치료 스케줄 표는 그야말로 대혼돈의 연속이다.


많은 난임 환자들이 퇴사를 결정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다. 병원 스케줄을 미리 알기 어려우니 직전에 휴가를 써야되는데 이게 허용되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다. 모닝진료가 있지만 7시 반에 시작되는 모닝진료를 받으려면 7시 전에 병원에 가서 대기를 해야 한다. 예기치 않게 진료가 끝나고 시술이나 주사가 있는 경우도 있다. 나는 다행히 직장의 배려를 받으며 치료를 받았지만 일반적인 회사였다면 나도 퇴사를 고려했을 것 같다.


난임 치료 기간 동안 나름대로 스트레스 관리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없는 스케줄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압박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난임 치료를 받은지 1년쯤 되었을 때 나는 갑자기 부정맥이 생겨 버렸다. 난자를 채취하는 시술은 대부분 수면 마취를 하고 이를 위해 시술 전에 심전도 검사를 한다. 그런데 이 검사에서 부정맥이 발견된 것이었다. 난임 병원 주치의는 난임 치료를 받아도 문제가 없다는 대학병원의 소견서를 요구했고 결국 나는 그 힘든 와중에 대학병원으로 향해야만 했다.


24시간 홀터기를 비롯해 각종 검사를 한 끝에, 나는 부정맥을 진단 받았다. 당시 부정맥 빈도가 꽤 높은 편이어서 대학병원의 주치의는 약물 치료를 고려해야 하는 경계라고 설명해줬다. 심혈관 내과 주치의 선생님은 자각 증상이 있었을 텐데 못 느꼈냐고 몇 번을 물으셨지만, 나는 정말 자각 증상이 없었다. 그냥 심장이 뛰는구나, 이런 느낌이랄까....... 주치의 선생님은 다만 아직 나이가 젊고 강도 높은 운동을 할 때 오히려 심장 박동이 안정되는 긍정적인 사인이 있기 때문에, 약물 치료를 미루고 난임 치료를 이어가라고 하셨다. 주기적인 추적 관찰과 함께.


일반적으로 부정맥 환자들은 임신을 하면 부정맥이 더 안좋아지는 경향이 있다. 나도 임신을 하고 나서는 더 자주 24시간 홀터기를 달고 심전도 검사를 했다. 출산 병원을 대학병원으로 선택한 것도 혹시 협진을 해야 할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재밌는 건 임신과 동시에 나의 부정맥 빈도는 뚝 떨어졌고 출산 후 몇 차례의 추적 관찰 끝에, 진료가 종료되었다.


부정맥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난임 치료 기간 중에 다양한 주사를 맞고 호르몬 약을 복용하지만, 이건 결국 임신 중에도 나오는 호르몬을 강제로 넣어주는 것일 뿐이라서 이게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원인은 스트레스 뿐.. 그렇다. 스트레스는 정말 만병의 근원이다.



금지어 = 마음을 편하게 먹어,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내가 난임 치료를 받을 때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중에 하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어, 따위의 말이었다. 난임 치료를 받는다고 하면 주변에서 위로나 격려를 해주는 말인데 돌이켜 보면 그런 말이 제일 나를 힘들게 했던 말인 것 같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고, 당연히 난임 치료를 받을 때 스트레스는 최악의 장애물이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든 난임 치료의 모~~~든 과정은 스트레스를 유발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면 안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스트레스를 받는. 그야 말로 스트레스는 무한하게 자가 증식한다. 그럴 주변에서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느니 스트레스가 가장 좋다느니..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속이 터져나간다. 굳이 말 안 해줘도 당사자가 제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 때문에 엄청 압박을 느끼고 있다는.....)


비슷한 시리즈로 00는 맘 편히 있었더니, 자연임신 되었더라, 가 있다. 난임 치료를 받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 부부처럼 자연임신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그치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리 부부를 위로하기 위해 자연임신 타령을 했고 그 때마다 얼마나 속에서 열불이 났는지 모른다. 그게 그렇게 될 일이었으면 내가 지금 병원 다니면서 내 배에 주사 놓고 있겠냐고....!!


그렇다면 난임 환자를 위로해주거나 격려해주고 싶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실 가장 좋은 위로와 격려는 모른 척 해주는 거다. 위로나 격려는 물론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다시금 나의 치료 과정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그냥 모른 척 해주는 사람들이 가장 고마웠던 것 같다. 아니면 정말 담백하게, 치료 많이 힘들다고 들었는데 힘들겠다, 힘내, 정도. 그 이상의 격려와 위로는 가뜩이나 힘든 환자들에게 더 많은 스트레스를 줄 뿐이다...!  



이전 10화 날 가장 힘들게 하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