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나의 몫
서울역 차병원에서 진행한 네 번의 이식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는 어느새 네 번의 채취와 여섯 번의 이식이 실패한 고차수 환자가 되어 있었다. 서울역 차병원에서 만난 첫 번째 주치의 선생님은 유명하지만 너무 불친절한 분이었고, 유명세 때문에 불친절함을 감내하던 나는 결국 내 이식 시술 도중 옆 의료진을 혼내는 모습을 보고 주치의 변경을 결심했다.
두 번째 만난 주치의 선생님은 젊지만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이었다. 대개 난임 의료진들은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항상 피곤에 지쳐있는데, 엄청 지쳐있는 와중에도 이식하기 전에 잘 될거라고 인사를 해주는 선생님이었다. 60% 성공률을 가지고 있다는 감자 배아가 착상에 실패했을 때 나보다도 안타까워해줬던 선생님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전원을 결정했는데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차병원의 시스템이 너무 나를 지치게 했다. 서울역 차병원은 초음파를 주치의가 직접 보지 않고 초음파실에서 보고 전달을 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주치의를 만나려면 먼저 초음파실에서 대기를 해서 초음파를 보고, 주치의 진료실 앞에서 다시 대기를 해야하는 방식인데 이게 경우에 따라서는 초음파실 대기 인원이 너무 많으면 주치의의 진료까지 밀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무엇보다 환자가 너무 많다보니 주치의와 각 파트별로 의사소통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 인상을 받았다. 가령 나는 난임 시술 중 심장 부정맥이 생기고 수면 마취 중 맥박이 너무 낮아져서 추가로 약을 넣어줘야 하는 상황이 몇 번 생겼는데, 나에게 상황을 듣고 나서야 내 상태를 안 주치의는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보고되지 않았음에 당황했고 급하게 심장 부정맥과 관련된 소견서를 요청했다. 해당 소견서가 없으면 시술을 진행할 수가 없어서 난 또 대학병원에 가서 소견서를 받느라 동동 거려야 했다는....
다른 하나는 같은 방법으로 계속 시도를 해야 한다는 주치의의 말 때문이었다. 나는 반착검사 결과 큰 이상이 없었고 난소 기능도 특별히 나쁘지 않았으며, 중간에 진행한 자궁경도 너무 깨끗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원인 불명의 난임환자인데,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왔던 방법으로 될 때까지 하는 것이 다음 차수 계획일 수밖에 없었다. 운이 나빠서 성공 확률 안에 못 드는 거니까 그게 들 때까지 해야 한다, 뭐 이런 개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60%도 실패한 내가, 그리고 이미 여섯 번을 실패한 내가, 계속 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공할까? 나는 더 이상 주치의의 말만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어차피 나의 치료이니 모든 건 내가 책임진다, 라는 마음으로 나는 두 번째 전원을 결심했다.
그길로 나는 집에 들어와 난임카페의 정보들을 서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뭘 해야 할지 의견을 묻는 글도 남겼다. prp, era, 방추사 수정, 한의원 병행 등 고차수 환자들은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고 있었고 나는 그 중에서 자궁의 착상 시간을 체크하는 era 검사가 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era 정도 되면 이제부터는 정보가 별로 없다. 반착검사나 크녹산, 혈전예방 주사 정도는 그래도 많이 하는 편인데 era는 시술 비용이 엄청 비쌀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잘 추천하지 않는, 고차수에게나 추천을 하는 시술이다. 아울러 병원마다 era에 대한 의견도 갈리는 편이어서 이번에 전원할 병원을 찾는 건 조금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일단 인터넷으로 era를 하는 병원 리스트를 검색하고 마리아 계열의 병원, 그 중에서도 본원에서 해당 시술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처음 전원할 때는 무조건 유명한 병원, 유명한 의사를 찾아갔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주치의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난임병원 의사들은 엄청 바쁘고 경우에 따라서는 초진 진료 예약을 걸어놓고 몇 주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도 왕왕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에 연락을 하면 다양한 방식으로 친절하게 상담을 해주는데, 나는 이걸 적극적으로 활용하길 추천한다. 우선 신설 마리아 병원에 전화를 해서 전원 계획을 알리고 era 시술을 하는지, 시술을 하는 선생님은 누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선생님의 전문 분야를 확인하고 주치의를 결정한 후에 상담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나의 히스토리를 설명하고, 최대한 절실하게...! era가 가능한지, 이게 해결 방법이 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하루 이틀 기다리면 의사 선생님이 직접 작성한 답변이 올라오는데, era가 해결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고 내원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상담 삼아 초진을 갖던 나는 주치의 선생님의 친절하고 따뜻한 위로에 펑펑 울며 상담을 마쳤고,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전원이 결정되었다.
두 군데의 병원을 거치면서 내 진료기록은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게 되었다. 두꺼운 A4 용지 한 묶음 정도 되는 서류를 들고 가서 상담실 선생님들이 1차로 과거 진료 내역을 입력하고, 진료실로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두꺼운 책 한권 분량의 서류를 가지고 왔냐고, 그동안 너무 고생많았다고 위로해주는 선생님의 첫 마디를 잊지 못 한다. 눈물 포인트였다는....
사실 난임 카페에 올라오는 선생님들에 대한 평가도 전원과 주치의 선택에 많은 영향을 준 건 사실이다. 불친절했던 예전 주치의는 유명세와 악명이 동시에 높은데, 나는 그 악명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명세에 눈이 멀어...! 내 발로 지옥불에 뛰어든 격이었다... ㅋㅋ 어쨌든 두 번째 전원에서도 난임 카페의 평가들을 검색해보긴 했지만 유명세보다는 나와 잘 맞는 선생님을 찾아가겠다, 라는 목표가 있었다.
네 번째 만난 주치의 선생님은 한 없이 친절한 분이기도 하지만 또 한 없이 단호한 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ㅋㅋ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다양한 시술들을 제안했을 때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고 필요한 경우 적극적으로 처방해줘서, 매우 만족하고 있다. 실제로 주치의 선생님은 매 차수 다른 약, 다른 시술을 통해 이전 차수의 문제들을 보완해줬고 그 때마다 환자인 나에게 정확하게 설명을 해줬다. 실패를 해도 그 실패가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건 그 다음의 방향, 그 다음의 시술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