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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4. 2019

[스페셜] 너의 눈빛

너를 기억할게 4.  <19년 뽀삐>와 아롱이


글·그림 마영신      





바보 개아롱이를 소개합니다

6호선 이태원역 다음 정거장인 한강진역에 내리면 역에서부터 뮤지컬 공연장, 예쁜 카페, 음식점, 빵집, 술집, 옷 가게가 주택가까지 이어져 있다. 불과 1~2년 사이에 평범한 주택가가 힙하게 변하였다. 한남동에 위치한 한강진역은 내가 자란 고향이다. 그래서 가끔 엄마 집에 갈 때마다 내가 알던 동네가 맞나 하곤 놀란다. 

한남동 토박이로서 말하자면, 한강진역 부근은 8~90년대가 가장 좋았다. 원래 그 장소엔 눈썰매를 타고 타잔 놀이를 하던 뒷동산이 있었고 뒷동산과 연결된 테니스장, 운전면허 시험장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사냥총을 만드는 총집도 있었다. 동네엔 꽃들과 다양한 곤충, 곳곳엔 서울 도심인데도 불구하고 사과, 포도, 앵두가 열려 있었다. 그리고 목줄 없는 개들의 천국이었다. 

당시에 친구들과 한남 1동 오락실에 놀러 갔다가 한남 2동 우리 동네로 복귀하면 마을 문지기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마을 입구의 작은 개가 문지기였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조그마한 놈이었는데 우리를 항상 벽에 바짝 붙게 해서 게걸음을 시켰다. 아슬아슬한 검문을 피해 과일의 성지인 총집에 열매를 따먹으러 가면 사냥개가 벽돌에 뚫린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고 필사적으로 열매를 지켰다. 사과는 돌을 던져서 쉽게 얻을 수 있었는데 그보단 사냥개가 지키는 포도를 몰래 따먹는 맛이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뒷산으로 가서 놀았다. 현재 한강진역 주차장 입구 쪽이 당시 테니스장 주인의 단독주택 자리인데 그곳엔 집을 지키는 작은 개들이 떼거지로 있었다. 테니스장 주인의 집 앞이 지름길이어서 가끔 그곳을 이용했는데 개들이 뛰어나오면 주차된 자동차 위로 올라가기 바빴다. 엉덩이를 물린 친구도 있어서 진짜로 공포였다. 하지만 테니스장 개들은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우리와 마주치면 얍삽하게 조용히 도망쳤다. 

그런데 어느 날, 테니스장 개가 우리 집 아롱이랑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내가 놀라서 다가가자 테니스 개는 도망치려고 했고 아롱이가 깨갱거려서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아롱이는 테니스 개의 새끼 여럿을 출산했다. 아, 내 인생의 첫 강아지인 아롱이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우리 집 작은 마당에서 키우던 치와와를 닮은 똥개였는데 똥개 출신답게 길가의 똥을 먹다가 자기 꼬리를 물며 빙빙 돌던 바보 개다.

     

너와 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아롱이를 키우던 시기는 초등학교 2~4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 똥강아지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아롱이 집에 내가 들어갈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실행에 옮겨, 몸을 꾸겨서 들어갔더니 개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생각보다 아늑했다. 이윽고 새끼들과 놀던 아롱이가 좁은 집으로 들어와서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아롱이를 아래로 쳐다봤고 아롱이는 나를 올려다봤다. 

‘누추한 곳에… 부끄럽게… 그래도 기뻐요.’ 아롱이는 정말 이런 눈빛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늑한 집에서 뛰어노는 새끼들을 한참을 바라봤다. (말이 한참이지 사실 1분 정도 될까.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 영원 같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첫키스 같은 그런…)

아롱이의 똥강아지들은 나중에 차례로 입양을 갔는데 세탁소 노부부한테 입양 간 뽀삐란 놈만 기억에 남아 있다. 왜냐하면, 똥수저에서 고기수저로 신분 상승을 한 전설의 개 팔자니까. 이놈이 고기만 먹어서 그런지 머리도 똑똑해서 내가 세탁소를 지나가면 나를 알아보곤 듬직하게 먼저 앞서서 우리 집까지 안내를 했다.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가끔 뒤도 돌아보면서 말이다. 그러곤 우리 집 마당에 도착해서 어미와 형제들에게 덤덤히 인사하고 세탁소로 복귀했다. 여기까지가 아롱이와 관련된 추억이다.      


똥 먹는 좋은 친구아롱이

그 뒤의 아롱이에 대한 기억은 없고 아롱이가 죽은 날만 뚜렷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아롱이는 늙어 죽지 않았다. 사고사였는데 외출하는 엄마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다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 외출하다 말고 집에 돌아와서 울먹이며 말하는 엄마의 얘기를 듣고 나는 곧장 횡단보도로 뛰어갔다. 아롱이는 어디에도 없었고 횡단보도 중앙에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뒷동산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이 불장난을 하는 줄 알고 산으로 갔다. 친구들은 없었고 테니스장 입구 쪽 먼 구석에서 청소부 아저씨 둘이서 불을 피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통나무 같은 게 보였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그게 우리 아롱이인 걸 알 수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슬픈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냥 무덤덤하게 체념했던 거 같다. 얼마 지나 집 안에서 똥개 뽀삐와 몰티즈 뽀삐를 차례로 키웠다. 똥개 뽀삐는 병으로 죽었고 몰티즈 뽀삐는 엄마가 생활고로 팔아버렸다. 몇 년을 키운 반려견들과의 이별은 당연히 너무나 슬펐다. 이후엔 절대 동물을 키우지 않았다.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집 안에서 키웠던 뽀삐 두 마리와의 기억보다 이상하게 아롱이와의 짧았던 시간이 기억에 선명하다. 지금 이 글을 쓰다가 아롱이에 대한 기억이 하나 더 생각났다. 아주 중요한 기억이다. 우리 집에서 살았던 뽀삐 1, 2는 고기밥을 먹을 때 내가 기어가서 킁킁거리며 뺏어 먹는 흉내를 내면 으르렁거리며 난리가 났다. 하지만 아롱이는 꼬리를 내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롱이가 똥을 먹어서 그렇지 좋은 친구였다. 만약 아롱이가 없었다면, <19년 뽀삐>의 병걸이가 마당에 있는 뽀삐의 집 안으로 들어가서 치유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19년 뽀삐>가 나오기까지


21년을 같이 살았던 강아지와 이별을 겪은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강아지가 나오는 만화를 그려준 적이 있다. 그때 친구들의 반응을 보면서 강아지 만화를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해야겠다는 영감을 얻었다.     


마영신

 <뭐 없나?>, <남동공단>, <벨트 위 벨트 아래>, <삐꾸래봉>, <엄마들>, <19년 뽀삐>, <콘센트>, <연결과 흐름>, <아티스트>, <너의 인스타>를 발표했다.      


위 글은 빅이슈 11월호 21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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