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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6. 2019

[아침요리] 취향이 담긴 요리

가을 솥밥


글·사진 문은정      





아침이다. 지난밤의 절망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희망만이 가득한 시간. 사방으로 뻗친 머리를 대충 동여매고 주방으로 향한다. 냉장고를 여니 지난 주말 시장에서 사 온 가을 산물이 한가득이다. 흡족한 마음으로 서성대며 잠시 고민하다 솥밥을 만들기로 한다. 잘 씻은 쌀에 육수를 붓고 앙증맞게 썬 연근이니 우엉, 고구마 따위를 잔뜩 올린다. 그리고 세심히 불을 조절하기만 하면 끝. 짭조름한 양념장을 넣어서 슥슥 비벼 먹는다. 솥의 벽면에 눌어붙은 고소한 누룽지도 별미. 물을 붓고 살살 끓여 후식으로 만들어도 좋다.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가. 요즘은 이렇게 구수한 요리들이 좋다. 아니, 생각해보니 요즘 만드는 것들이 주로 이렇다. 최근 들어 요리가 취향을 따르기 시작했다.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그렇다. 아침은 나를 위한 요리를 하는 시간이다. 물론 이른 시간부터 타인을 위해 요리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나를 위해 만든다. 만드는 것도 먹는 사람도 나이기에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았다. 나의 취향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자주 먹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자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좋아한다는 의미니까. 말보다 행동이 먼저라고, 그놈이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행동으로 볼 수 있지 않나. 비슷한 거다. 처음에는 대세에 몸을 맡기고, 수플레 팬케이크나 샌드위치 같은 것에 커피 한 잔을 마시곤 했다. 그렇게 폼을 잡았다. 그런데 영 속이 헛헛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국인은 역시 밥이지. 나는 자신의 촌스러운 입맛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무엇이든, 취향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음식의 경우, 어릴 적부터 차곡차곡 먹어온 다양한 미식의 경험이 취향이 된다. 나는 너른 평야가 넘실대는 곡창지대에서 자랐다. 이맘때면 논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산에는 윤이 반들반들 도는 감이니 밤 따위가 지천이었다. 캄캄하고 습한 숲 속에서 버섯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동네 아지매들이 늙은 호박을 석석 썰어 채반에 널었고, 가끔 길에서는 떨어진 은행 냄새가 났다. 그러면 코를 막고 뛰었다. 


하지만 도시 생활자가 된 뒤로는 그러한 풍경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시장에 갔다. 시장에 가면 제철 산물들이 지천이지 않나. 특히 늦가을인 지금은 황금빛 채소가 많을 시기다. 지난주에는 고구마나 연근, 우엉 따위의 뿌리채소를 잔뜩 사 왔다. 특히 경동시장은 특정 채소를 전문으로 하는 상인들이 많아 좋은데, 연근이나 우엉만 파는 상인, 나물류만 파는 상인, 버섯류만 파는 상인 같은 채소 업계의 전문가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전문으로 팔기에 더욱 세밀한 종류의 채소를 살 수 있고, 손질하는 방식이나 보관법 같은 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신기한 채소도 많다. 버섯을 전문으로 하는 집에서 ‘백화고’라는 버섯을 보았는데, 이는 표고버섯 중에서도 최상품이라고 했다. 속살을 살짝 떼어 입에 넣어보니 버섯의 향긋함이 진하게 농축되어 있었다. 백화고로 만들 요리를 생각하며 장바구니에 주섬주섬 버섯을 담았다. 


요리의 팔할은 재료다. 어떤 훌륭한 셰프도 자연을 이길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자연이 최상의 맛을 요리하는 때는 제철이다. 그래서 요즘은 아침부터 좋아하는 가을 채소를 만지고, 그것으로 촌스러운 요리를 하는 일에 푹 빠져 있다. 요리의 색은 점점 칙칙해져가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더욱 솔직해진 것 같아 만족스럽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음식을 먹고 있는가. 그것은 요리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꽤나 중요한 문제일 것 같다.     

       

가을 솥밥 

가을 제철 채소를 잔뜩 넣어 만든 솥밥. 

쌀쌀한 아침, 따듯하고 든든한 한 끼로 좋다. 


재료(1인분)

쌀 1컵, 국멸치 5개, 연근 1/5개, 당근 1/4개, 우엉(10cm) 1개, 단호박 슬라이스 1개, 밤고구마(작은 것) 1개, 양념장(간장 2큰술, 맛술 1/2큰술, 매실액 1/2큰술, 참기름 1작은술)     


만들기

1 쌀은 30분간 물에 불린 뒤 체에 받쳐 물기를 뺀다. 

2 끓는 물에 똥을 뺀 멸치를 넣고 끓여 육수를 낸다. 

3 껍질을 벗긴 연근은 0.5cm 두께로 썬 뒤 식초물에 담근다. 

4 당근과 우엉은 얇게 채썰고, 단호박과 밤고구마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5 냄비에 불린 쌀과 당근, 우엉, 2의 육수를 넣은 뒤 센불에 올린다. 끓기 시작하면 뚜껑을 닫고 중불에 10분간 끓인다. 

6 5에 단호박과 연근을 넣고 뚜껑을 닫은 뒤 10분간 약불에 뜸을 들인다. 

7 양념장을 곁들여 먹는다.      


위 글은 빅이슈 11월호 21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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