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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31. 2019

[가만히 많이] ‘리셋’할 수 없는 마음


 이진혁





스무 살 되던 해에 알게 된 일본인 앞에서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경멸당한 기억이 납니다. ‘완’자가 장난감이라는 뜻임을 깨닫고는 저도 많이 놀랐죠. 그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로 연락이 끊겼는데, 그 10여 년 사이 한국 사회도 동물에 관한 인식이 꽤 나아졌습니다. 지금 그 친구를 다시 만나서 “어이, 나카무라, 너의 나라에서는 아직 ‘펫’이라는 단어를 일반적으로 쓴다지? 우리는 이제 ‘반려동물’이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고 난 일본 맥주를 끊었어”라고 우스갯소리 하는 상상을 잠깐 해봤습니다. 


제 인생 유일한 반려동물은 1997년에 엄마를 졸라서 산 ‘다마고치’입니다. 처음 그걸 알게 된 날에는 손바닥만 한 기계를 보며 “밥 줘야 한다”, “주사 맞혀야 한다” 중얼거리는 아이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마고치가 동물 양육 시뮬레이션 기계라는 걸 알게 되고는 ‘오오! 이런 게 바로 세기말의 애완동물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H.O.T가(검열당한 후렴구로) ‘늑대와 양’을 부르며 세기말의 기운을 높이던 때였으니까요. 


아무튼, 저는 완전 넋이 나갔고 그걸 갖고 싶어서 앓아누웠습니다. 엄마가 다마고치를 사주지 않으려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1) 금방 질려서 안 하게 될 거다. 2) 지금은 비싼데 조금만 지나면 가격이 많이 떨어질 거다. 3) 학교 수업에 방해가 된다. 저는 거기에 어린이 특유의 세 가지 반박으로 맞섰습니다. 1) 평생 갖고 놀 거다. 2) 이건 수입품이라 가격이 안 떨어진다. 3) 학교에서는 안 하겠다. 결국 엄마는 떼쓰는 아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는지 제 소원을 들어줬으나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엄마의 말이 모두 맞았다는 게 밝혀졌고, 제 다마고치는 거의 엄마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엄마한테도 끝내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사실 저는 다마고치를 키우다 보면 좀 우울해졌습니다. 제때 밥도 주고 물도 주고 똥도 치우고 주사도 맞혔는데, 그게 무엇으로 자라날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제가 처음 키운 아이는 감자 같은 얼굴에 악마의 날개가 달린 키메라로 최종 진화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두 번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친구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형태가 나오면 건전지를 뽑아서 ‘애완동물’을 ‘리셋’했는데, 그러는 것도 좀 괴기스러웠죠. 무언가를 기른다는 건 밥 주고 물 주는 일이 아니라, 그게 무엇으로 변하든 아끼고 사랑하는 일이라는 걸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동물과 함께 살 엄두는 못 내고 하루에 한 시간씩 스마트폰으로 개나 고양이 유튜브를 봅니다.


유튜브에는 수많은 ‘셀럽’ 반려동물들이 있고, 그들의 인기는 대단해서 같이 사는 ‘집사’들에게 큰돈까지 안겨줍니다. 동물과 사람이 모두 행복할 테니 멋진 일이죠. 하지만 정반대 이야기도 많습니다. 최근 부산에서 경마 기수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죽음의 배경에 어마어마한 부정과 갑질이 있었다는 의혹이 속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죽음이 처음은 아닙니다. 2년 전에도 부산에서 마필 관리사 두 명이 잇달아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때는 많은 시민들이 그들의 죽음을 위로하는 싸움에 함께했고, 그 투쟁 기록이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두 명의 생전 육성도 담겨 있었는데,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한마디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나는 말이 좋아서 일합니다, 행님.”


그들에게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말이 너무 좋아서, 낮은 임금도 불안정한 고용도 폭력적인 경쟁도 참아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말이 레이싱 기계처럼 다뤄지는 현실은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큰 아픔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일은 그저 밥 주고 물 주면 끝나는 게 아니라, 말들과 마음을 나누며 함께 자라나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조금 느려서 경주에 졌더라도, 그들을 더 채찍질하기보다는 보듬어주고 싶었을 테니까요. 다마고치 한 번 키워본 저로서는 도저히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가 없겠지요.


‘동물’이 ‘산업’으로 변해가며 다치고 버려지는 것은 동물뿐만이 아닙니다. 그 동물들과 마음을 나눠본 사람들도 함께 망가집니다. 그 아픔은 건전지 하나 뽑아서 ‘리셋’될 수 없는 것이기에 자기 목숨을 끊는 일도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겠지요. 세기말도 벌써 지났고 애완의 시대가 가고 반려의 시대가 왔으니, 이러한 잔인한 이야기들도 끝나기를 바랍니다. 말이 좋아서, 혹은 다른 동물이 좋아서 일하다가 마음을 다친 모든 분들이 오늘밤에는 그들의 반려들과 뛰노는 행복한 꿈을 꾸기를 바랍니다. 어떤 ‘리셋’도 필요 없는, 그런 행복한 마음으로요.


이진혁  

출판편집자. 밴드 ‘선운사주지승’에서 활동 중. 


위 글은 빅이슈 12월호 21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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