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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31. 2019

[에세이] 코덕, 탈코르셋을 만나다


 영켱(팜므팥알) 





화장도 안 하냐예의 없이!

화장을 처음 시작한 건 대학에 입학하고도 몇 달이 지나서였다. 나 자신을 예쁘다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크게 못났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로션 바르기도 귀찮았기에 화장은 내게 먼 나라이야기였다. 꾸며야 한다는 생각도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토록 무던한 나를 화장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짓궂은 남자 선배들의 악의 없이 악의 가득한 말장난이었다. 너는 여자도 아니냐는, 화장을 안 하는 여자는 예의가 없는 것이다 따위의 말들. 지금 들었더라면 '뭐? X발?' 하며 책상이라도 엎었을 텐데, 15년 전의 나는 그 자리에서 찔끔 나오던 눈물을 참고 그냥 재미있는 척 웃어넘겼다. 정작 내게 그런 소리를 씨불였던 그들은 잘 씻고 다니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날 나는 제대로 한마디도 못하고 화장품을 사러 가고 말았다.


화장으로 성형하는 여자들

입문은 이토록 아픈 기억 때문이었지만, 이후 나는 왜 늦게 시작했나 후회할 정도로 화장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무 쌍꺼풀의 눈이던 내게 아이라인과의 만남은 운명과도 같았다. 그리는 데까지 내 눈이라는 기가 막힌 스킬로 아이라인을 그리고, 흐릿한 입술색을 쨍하게 만드는 립스틱까지 바르고 나면 마치 더 강한 내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화장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이전보다 나를 더 존중해주었다. 이전에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나랑 특별히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던 사람들도 말이다. 화장 하나로 내가 대단한 미인이 된 것도 아니었으니, 이것은 화장을 하지 않은 나, 여자로서 꾸미지 않은 나를 사람들이 어떻게 대해왔는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지점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눈이 아파도 렌즈를 꼭 끼고, 아무리 시험기간이라도 치마를 챙겨 입고, 눈 화장을 하지 않은 날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던 것이. 익숙한 요즘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단히 코르셋을 입은 셈이다.


내 코덕질의 궁극은 민낯

그렇게 20대를 꼬박 보냈다. 화장 기술 역시 점점 늘었고, 피부 관리법, 머릿결 관리법, 향수를 고르는 법, 고데기를 잘 하는 법을 모두 마스터하며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는 ‘남자들이 좋아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늘 함께했다. 고백하건대 정말 나는 20대를 외모를 꾸미는 것에 정신이 빠져서 지냈다. 그것이 내 세상의 전부인 양 돈과 시간, 마음을 모두 쏟았다.

그리고 30대가 되어, 탈코르셋을 외치는 10대들을 마주했다. 로드숍의 영향으로 우리 때보다 훨씬 빨리 화장품을 접했을, 마음만 먹는다면 모든 뷰티 정보를 섭렵할 수 있을 세대다. 그런데도 화장을 하지 않고, 머리도 길게 늘어뜨리지 않으며, 편한 옷을 입고, 브래지어조차 거부하겠다 말하는 그들은 규격화된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또 거부했다.  

나는 그들이 거북스러웠다. 차르르한 색조의 오묘함과 파운데이션의 광택을 사랑하노라고, 화장을 하는 시간이 행복하고, 나를 꾸미는 자체에서 만족을 얻는다고 변명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변명일 뿐이다. 나는 집에서 혼자 있을 때, 렌즈를 끼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는다. 사실 나도 보디로션을 바르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귀찮고, 답답하게 얼굴에 LED 전기 마스크를 끼고 누워 있고 싶지 않다. 다만 경험했을 뿐이다. 외모 꾸미기의 달콤하고 무거운 권력을. 

당장 화장대에 가득 찬 화장품들을 내다 버릴 수 있을까? 당장 이번 주 경조사에 맨얼굴로 나갈 수 있을까? 아직 내게 그것들은 너무나 버겁다. 하지만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지려 한다. 적어도 동네에 나갈 때라도, 친한 사람들을 만날 때만이라도, 누구에게 예뻐 보이려는 노력을 조금 더 줄이고 위생적이고 단정한 차림을 고수하기로. 익숙하지 않은, 불편하지만 편안한 변화를 다시 시작하며 상상해본다. 십수년 전 그날의 나를. 화장품 가게가 아닌 탈코를 외치는 그들 사이에 서 있는 나를. 아마도 그곳에서 맨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을 스무 살의 나를.  


영켱(팜므팥알) 

독립출판물 <9여친 1집>, <9여친 2집>을 제작했고, 

단행본 <연애의 민낯>을 썼다.


위 글은 빅이슈 12월호 21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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