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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19. 2019

[스페셜] 9. 셋째 딸은 태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몰랐던 인공 임신중단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가 ‘헌법불합치’라고 결정했다. 인공 임신중단을 처벌하는 법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애초에 여성이 임신을 중단하는 게 왜 죄가 되는지 모르겠다. 66년 전에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대부분 남자였을 확률이 높다) “임신을 중단한 여성과 그것을 도운 의사를 모두 처벌하자.”라고 결정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임신중단은 범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여성들이 임신중단을 ‘남용’해서 ‘생명 경시 풍조’가 생긴다고 말하곤 한다. 마치 여자들이 임신중단을 ‘재미’로 선택할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여성의 몸이 임신중단을 하며 어떤 일을 겪는지 전혀 모른다. 사실 나도 잘 몰랐다. 여성생활미디어 <핀치>에서 일하면서 인공 임신중단 경험에 대해 생생하게 말해주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얼마나 피가 나오는지, 얼마나 아픈지, 어디가 아픈지, 어떤 영양제가 도움이 됐는지. 그들은 자세히 기록했다. 여성으로 사는 한 언제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한 번도 학교나 부모에게 배운 적 없는 일이기에, 언젠가 또 다른 여성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글 신한슬

여성생활미디어 핀치(http://thepin.ch) 에디터

<살 빼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데요> 저자.





이 세상 여자 4분의 1이 겪는 임신중단

임신중단은 굳이 경험해보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이 세상의 여자들 중 4분의 1이 경험한 일(WHO, 2000~2014)이며, 안전하게 진행됐다면 반드시 회복될 것이고, 이후에도 인생은 순조롭게 이어질 것이다.


2008년, 헌법재판소는 태아 성감별 금지가 ‘헌법불합치’라고 결정했다.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행위를 금지한 법률이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태아의 성감별이 왜 금지되었는지는 잘 알고 있다. 내가 태어난 해가 바로 1990년이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인구동향조사를 시작한 이래, 여자아이에 비해 남자아이가 가장 많이 태어난 해다(여아 100명당 남아 116.5명). 나는 첫째였고, 직장생활을 하던 어머니가 한 차례 유산을 겪은 뒤에 태어난 ‘귀한 아기’였지만, 나와 달리 셋째로 이 세상에 오려던 동갑내기 여자아이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셋째만은 반드시 아들을 원하는 가정이 대다수였다. 


인공 임신중단을 범죄화하는 국가에선 정확한 임신중단 통계를 잡기 힘들다. 그러나 셋째로 태어난 아이들의 성비는 인공적인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그저 태아가 여자라는 이유로 임신을 중단한 경우가 매우 많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셋째부터 남아가 여아보다 두 배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태아 성감별을 법으로 금지한 걸 보면 국가도 비슷한 추론을 했던 모양이다. 정말로 인공 임신중단이 늘어날수록 생명 경시 풍조가 생긴다면, 이미 1990년에 대한민국에는 생명 경시 풍조가 굳건히 자리 잡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여자의 생명만 경시되는 풍조가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좋아해서 죽였다.”, “헤어지자고 해서 죽였다.”,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는 뉴스가  이어지는 걸까?


이 시기에도 물론 인공 임신중단은 범죄였다. 하지만 셋째 딸을 낳는 건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죄였던 모양이다. 법은 멀고 시댁은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여성을 임신하는 것도 여성의 죄, 여성이라서 임신을 중단해도 여성의 죄,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도 여성의 죄.     


여자아이를 원하지 않는 사회

어쩌면 셋째 딸을 낳지 않기로 결심한 여성들의 선택이 현명했는지 모른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툭하면 죄인이 되는 세상에 여성으로 태어나는 게 더 잔인한 일이었을지도.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의 어머니는 셋째를 임신하고 초음파 검사를 받는데, 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임신을 중단한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니, 여성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언제든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임신 중단은 당사자인 임신한 여성의 의사라고만 보기 어렵다. 그 여성이 원하지 않은 아이가 아니라 시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이, 남편이 원하지 않는 아이, 한국 사회가 원하지 않는 아이,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무사히 태어난 여자아이라고 남아선호를 피할 수 있을 리 없다. 명절이 지나면 친구들이 집안에 공기처럼 잔존하는 남아선호사상에 대한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10대 중반, 초경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와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비출산을 다짐했다. 때로 어린이는 불공평에 있어 어른보다 엄격하며 그 원한을 잊지 않는다. 


언론은 이제 서른이 되어가는 우리 세대를 두고 “아이 낳을 여성이 없다.”며 뒤늦게 호들갑이다. 여전히 여자아이를 원하는 게 아니라 ‘아이 낳을 자궁’을 원하는 듯하다. 여자를 개인으로, 그 자체로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하는 인격체로 취급하지 못한다면, 출산을 원하는 여자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딸을 낳는다면,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할 텐데.


위 글은 빅이슈 12월호 21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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