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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0. 2019

[일러스트 에세이] 미스 박과 선생님


글·그림 박정은



톡 창에 알람이 깜박거렸다.

“안녕, 나 지금 한국이야” 

“어머, 카티 오랜만이야”

“가족이랑 여행 와서 지금 부산인데 다음 주에 서울 가니 만나자”

“언제가 좋아?”

“그래, 주말이나 저녁때면 좋아”

“내가 작업실 쪽으로 갈까?”

“나 작업실에서 나와서 취직했어”

“정말 좋은 소식이네”     


오랜만에 카티가 한국에 와서 만나기로 했다.

일하면서 알게 된 사이지만 어설픈 영어로 수다를 떨었다. 

아마도 그녀가 내 생활권 밖의 사람이어서였을까 쉽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상대가 솔직해지는 걸 좀 더 쉽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전에 독일에 갔을 때 한 번 만난 적 있는 그녀의 어머니도 함께였다.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너 풀타임 잡 가지게 됐다며, 어때?”

“무슨 일 하는 거야? 그림 그리는 일이랑 관련 있는 거야?”

“아니 전혀 그런 건 아니야. 나쁘진 않아. 오피스에서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 house keeper처럼 office keeper라고 할까? 간단한 업무, 엑셀 입력, 전화 받기, 팩스 넣기, 청소도  은행 심부름도 하고, 화분에 물도 주고 그런 일.”

“요즘에도 팩스를 쓰는 회사가 있어?”

“사무실에 계시는 분들이 다 60세 이상이셔, 그래서 거기선 나를 미스 박이라고 불러”

한국에서 사용되는 미스 박이라는 호칭이 주는 느낌을 영어로 어떻게 말하지?     


과거 일하는 여성이 드물었던 시절, 사회에서 일하는 여자에게 ‘미스 O’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남녀 차별적이기도 하고, 멸칭에 가까운 표현이 되었지만, 미스 박이라는 호칭은 영어에서는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Mr. Darcy나 쓸 법한 아주 정중한 표현이기에 더욱 설명하기 어려웠다.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영어로는 문화 차이를 전달할 수 없어 답답했다.     


카티 어머니가 말을 이어받으셨다.

“뭐? 그러니까 회사에서 정은 씨를 옛날에 다방에서 부르듯 미스 박이라고 부른다고?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하하하하” 그러곤 바로 독일어로 카티에게 설명해주셨다.

카티 어머니는 역사 속 독일로 떠난 간호사이셨고, 30대 후반의 딸과 손주를 둔 할머니였지만, 그 세대와 대화할 때 드는 그 답답한 기분이 들지 않아 신기했다. 이민자들은 한국을 떠난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화는 수직적이지 않았고 가로로 넓게 흘렀다.      


내가 오기 전 이 자리엔 미스 송이 있었다.

미스 송. 인수인계 받을 때 본 그녀는 결혼도 임신도 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미스 송이었고 그렇게 이곳에서 18년 동안 미스 송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고 직책도 호칭도 명함도 없는 그 자리엔 내가 왔다. 그리고 나는 미스 박이 되었다.      

그림 그리는 일을 할 때는 선생님 혹은 작가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선생님 여기에 사인하시면 돼요.”

‘양도 계약서… 갑: 나, 을: 회사… 저작권은 을에게 귀속된다. 2차 저작권은 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   

내가 갑이지만 나에게 불리한 조건의 계약들. 

그래서 자신들의 월급의 반에 반도 안 되는 돈을 주며 극존칭을 쓰는 걸까? 

늘 궁금했다.     


“선생님 돈 때문에 그림 그리시는 거 아니잖아요.”

“저… 입금은 언제 되나요?”

“이번 달 말에 될 거예요”

“아직 입금 안 됐는데요?”

“아마 다음 달에 될 거예요”

“선생님 저희도 어려워요”

“아 네…”

“다음에 저희가 다른 작품 의뢰드릴게요”

정말 나보다 더 어려울까? 그렇게 다음은 오지 않았다.

존중은 호칭이 아니라 행동이길 바랐다.     


“선생님 천 원입니다.”

선생님이라는 말은 지하철에서 물건 파는 상인이 1000원을 건네는 고객에게 하는 표현이기도 했고, 어느 날부터인지 관공서에서 가면 민원인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통일해 불렀다.

타인을 부르는 게 서툰 한국인들에게 “저기요” 대신에 “선생님”으로 호칭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미스 박.”

“미스 박 도장.”

“미스 박 커피.”

“미스 박 물.”

“미스 박 이것 좀 봐봐.”

“미스 박 이리 와 봐.”     

부르면 바로바로 "네"하고 일어나야 한다.

즉시 대답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제 그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하는 일이 달라져 호칭이 달라졌다. 

남이 나를 어떻게 불러주는지에 따라 이제 나는 달라지는 걸까?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나에 대해 스스로 솔직해지는 게  조금 쉬워졌다. 


박정은 

일러스트레이터.

<식물저승사자>, <1982 야구소년> 등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위 글은 빅이슈 12월호 21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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