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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an 17. 2020

[에세이]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지금 이곳

나의 주거 정착기


Writer 영켱(팜므팥알)





나의 ‘주거’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학교 앞 작은 원룸텔이다. 부모님과 함께 인천에서 평생을 살았고, 웬만한 곳은 지하철과 빨간 버스로 이동이 가능하기에 내게 자취란 언감생심 꿈만 꾸던 이야기였다.그러던 차에 우리 집은 가만있었는데 학교가 이사를 가는 바람에 이런 일이? 하겠지만 정말이다. 약 10년 전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나의 첫 홀로 주거는 시작되었다.


처음엔 근사한 원룸을 생각했지만 쫄보인 나는 치안의 문제로 쾌적함을 조금 포기했다. 그리고 발견한 곳은 ‘원룸텔’의 이름을 단 고시텔. 학교 정문까지 거리는 도보로 5분, 내가 주로 수업을 듣는 건물까지는 빨리 뛰면 10분이 걸리는 위치였다. 나름 개별 화장실이 있었고, 유리 통창에 채광이 좋아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비록 책상 아래 바로 침대가 있고 그 옆은 화장실인 3평 짜리 공간이었지만 그런 것쯤은 독립뽕에 취한 내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금 무섭게 생긴 젊은 남자 주인이 상주했고, 출입구와 내 방 문에는 든든한 번호키가 달려 있어서 치안 문제도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곳을 첫 주거 독립지로 삼고 한 학기를 살았다. 오빠가 선물해준 화분을 창가에 두고 좋아하는 그림들을 벽에 붙이며 꽤나 아기자기한 기분을 만끽하며 살았다. 좁디좁은 곳이었지만 가끔 친구를 불러 공강 시간에 낮잠도 자고, 저녁엔 맥주도 마시면서 꽤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 학기밖에 살지 못한 이유들은 그 즐거움과 아기자기함보다 크고 건재했다. 첫 번째는 비용의 문제였다. 당시 4인 1실 기숙사 비용은 한 달에 20만 원이었던 것에 비해, 내가살던 곳의 월세는 47만 원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꽤 비싸다. 보증금이 없는 고시텔의 특성을 감안해도 결코 적지 않은 비용이었다. 두 번째는 젊은 남자 주인의 무신경함이다. 물론 안전의 문제로 모든 방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있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그 주인은 방한 커튼을 바꾼다거나 하는 용건으로 내가 학교에 간 사이 내 동의 없이 방에 들어왔다 가곤했다. 당시에는 시험기간에 쌓아둔 빨래 물론 속옷도라든지 펼쳐둔 다이어리 등 때문에 수치스러웠지만, 지금생각하면 그보다 큰 범죄 가능성들이 먼저 떠올라 아찔해진다. 그런 이유들로 나는 미련 없이 그곳을 나와 기숙사로 들어갔다.


이후 내가 독립해 나의 주거지를 갖기까지는 학교 졸업 후, 5년가량이 더 걸렸다. 이번에 내가 살게 된 곳은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회사가 합정에 있기에 그 근처에 살기를 바랐지만 내가 낼 수 있는 월세와 내가 원하는 환경이 갖춰진 곳은 그보다 한참 떨어진 도시 외곽에 있었다. 그래도 시설은 꽤 마음에 들었고이때도 유리 통창에 집착했다. 지하철역 바로 앞에 있는 곳이라 밤에 도 걱정이 덜했다. 7평 정도의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행복했다. 이케아까지 부득불 찾아가 인테리어 소품을 사고 꾸미고, 그럴듯하게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행복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치안의 문제를 들어 굳이 관리비가 비싼 오피스텔을 찾아 들어갔건만 그곳에도 맹점이 있었다. 아마 내가 있는 곳에도 불법 오피스텔 성매매가 있었던 모양이다. 새벽에 불쑥 우리 집 벨을 누르는 젊은 남자들이 있었다. 아마 호수를 착각한 듯하다. 새벽 3~4시에 우리 집 벨을 누르며 “안녕하세요, 문 열어주세요.”라고 말하는 남자들은 내게 극한의 공포 그 자체였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싶었지만, 우리 집을 이미 아는 이들이니 나중에라도 해코지할까 봐 나는 숨을 죽이고 경비실 호출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평수가 다양해서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가족들도 사는 곳이었는데도 그랬다. 어디에도 위험과 불법은 존재했고 똑같은 월세를 내지만 나는 그것에 더욱 취약한 존재였다. 그래도 그곳에서 1년 반을 살았고 내 소중한 고양이와의 삶도 그곳에서 처음 시작했다. 몽글몽글한 기억과 공포의 기억들이 뒤섞인 채 나는 결혼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사실 곱게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집주인님과 부동산의 합동 공세로 꽤나 골머리를 앓았고 듣지 않아도 될 악담도 들었으며, 몇 달 월세에 해당하는 비용도 손해를 보고 떠났다. 작은 방 하나였지만 주인의 알력과 세입자의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달랐다. 이때 새긴 교훈은 하나다. 말은 소용없다. 약속도 소용없다. 무조건 계약서에 특약사항을 적고 사인을 받자. 어른에게 예의를 차리는 건 계약서 사인하고 그다음에. 치사해 보여도 계약서에 적어주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는 게 맞다. ‘그래요, 그래요’ 하는 사람 좋은 말은 정말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혼하고 들어간 곳은 다행히 집주인이 LH인 아파트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사실 퇴거할 때 결정될 테지만. 사실 나는 청약에 정말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청약 당첨되어도 낼 돈이 없는데 어떻게 사나 하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이었지 싶다. 국민임대, 공공임대의 개념은 알지도 못했다. 급여 통장과 함께 만든 청약 통장은 어느 정도 돈이 쌓이자 깨고 가방을 샀더랬다. 이토록 철없던 내가 임대 아파트를 알게 된 건 오피스텔에 살던 당시 옆자리 팀장님 덕분이었다. 내 독립을 축하하며 월세를 묻던 팀장님께 월세를 이야기했더니 경악하셨던 게 기억난다. 그날로 나는 바로 청약 통장을 다시 만들었고, 매일매일 LH 홈페이지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모든 공고를 읽고 수도권 지역은 연습 삼아 모두 신청을 넣었다. 그러기를 6개월,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조건 없이 무작위로 추첨하는 추가모집에 당첨됐다. 경기도에 있는 신도시의 신축 아파트였고 내가 결혼하기로 예정한 그해에 입주 시작이었다. 경쟁률은 거의 2000:1, 나는 한 번도 이런 높은 경쟁률에서 승리한 바가 없었는데 아마 이때 내 운이 몰빵되었지 싶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지금 2년째 고양이 두 마리와 인간 한 명과 더불어 주거하고 있다. 내가 사는 곳은 24평형의 10년 공공임대 아파트로, 10년 동안 임대료를 내고 거주하고 10년차에 감정가를 토대로 분양권을 매매할 수 있다. 대출을 받아 보증금을 최대로 넣어, 내고 있는 월 임대료는 약 20만 원. 공교롭게도 10년 전 4인 1실 기숙사비와 같다.


이렇게 핑크빛으로 결말을 낸다면 나도 참 좋겠지만, 나의 주거 정착기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벌써 2년이 지났으니 8년 후에는 이 집을 살 수 있도록 저축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 아니겠냐고? 그런데 그게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앞으로 이 지역에 있을 호재 때문이다. 아직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이곳은, 몇 년 후 서울까지 직통 지하철이 생긴다. 이제 겨우 착공이 들어간 그 지하철 하나로 이 주변 아파트들은 짧은 기간 벌써 몇 억씩 가격이 올랐다. 지하철 개통 시기와 내가 사는 아파트의 분양권 전환 시기는 가까이 맞닿아 있다. 8년 후,나는 이 집에서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계속 살 수 있을까?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교통이 계속 불편해도 좋으니 나는 나의 신혼집에서 더 오래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라면 내가 너무 바보 같은 걸까?


앓는 소리를 늘어놨지만 사실 내가 그다지 고생하지 않은, 오히려 운이 좋은 케이스라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운이 좋은 케이스라 해도, 스스로 살 곳을 찾고 구하고 정착하기란 꽤나 지난한 과정이 함께했다. 쑥스럽지만 이 모든 과정들을 가감 없이 낱낱이 공개했다. 새로이 정착을 시작하고 꿈꾸는 이들에게 내 주거 정착기가 타산지석이 되길 조심스레 바란다.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사는 현실의 공간, 언젠가 그곳이 우리 모두에게 걱정과 불안이 없는 그저 안정과 따뜻함만을 주는 곳이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영켱(팜므팥알)

독립출판물 <9여친 1집>,

<9여친 2집>을 제작했고,

단행본 <연애의 민낯>을 썼다.


위 글은 빅이슈 10월호 21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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