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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an 17. 2020

[에세이] 계급유감


Writer 배민영

Photo Providing 임동현





벌써 23년 전이다. 등 번호 23번을 단 마이클 조던이 에어워크를 하며 긴 체공 시간을 자랑하고 있을 때 한국은 자본주의의 달달함에 취해 IMF의 쓰나미가 1년 후에 덤벼들 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흥청망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중가요계에서 돈을 쓸어 담으며 최고의 자본가로 성장 중이던 서태지는 가식적인 세태를 조롱하는 노래 <시대유감>을 발표하고 가사 문제로 한국공연윤리위원회와 기싸움을 한 지 1년 만에 ‘표현의 자유’ 역사에한 획을 긋는 사전심의제도 폐지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그 1년 사이 서태지는 돌연 은퇴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으로 떠났었다. 인터넷이 없어 신문과 방송에 의존하던 당시엔 그의 도미가 그야말로 예수나 신선의 승천 같은 느낌이었고, 90년대가 끝날 때까지 한국의 대중문화는 한동안 그가 남긴 코드를 변주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그의 예언대로 21세기에 들어서도 정신쇠약에 걸린 우리 사회의 건강지수는 거의 회복된 적이 없다. 반짝 즐거웠던 2002 월드컵 이후 정치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실업률과 빈부 격차는 더더욱 늘어났고, 가족은 붕괴되었다. 그 속에서 가장 유감인 것은 누구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스타 마케팅을 통해 격상되었다는 한 편의점 도시락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두 토막의 ‘방망이 소세지’이다. 나는 그 ‘누구’에게 별 감정이 없다. 오히려 방송에서 보이는 그의 인성은 꽤 괜찮아 보인다. 외식업을 하는 이들에게 진심 어린 충고와 때론 분노를 아끼지 않는 그는 진솔해 보이는 사람에 속한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좀 더 독하게 말하면 ‘이용하는’ 방송과 문화산업 메커니즘은 종종 불만이다.


우리의 의식주는 계급을 반영한다. 그 사람의 경제 수준이 문화 향유나 삶의 질과 직결되는 경우 역시 적지 않다. 물론 그 안에는 엄청난 언밸런스가 있다. 하지만 혼종의 시대, 그것을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는 사실상 없다. 그저 바라보며 역겨움을 느낄 때가 있지만 개인의 취향 또는 기호의 차이라고 해두는 게 신상에 좋다.


영화 <기생충>에 나온 음식이 있다. 바로 ‘한우 채끝 짜파구리’. 이제 상도 탔고, 다들 봤을 것이기 때문에 짜파구리가 등장하는 장면을 잠시 소개하자면, 부잣집에 과외 선생, 가정부, 운전기사로 하나 둘씩 침투한 기택의 가족은 주인들이 놀러 간 틈을 타 그 집의 고급술들을 꺼내 마시며 신나게 부자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정부 충숙장혜진은 폭우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사모님 연교(조여정) 전화를 받고 아연실색한다. 주어진 시간은 8분, 그동안 집을 다 치우고 짜파구리까지 끓여놔야 하는 아수라장을 보며 관객들은 계급 반란은 그야말로 일춘몽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사실 전 세계 영화 역사에서 수직적인 공간이 계급이나 계층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인 경우는 많았어요. 처음은 아닌데, 대신 우리 영화의 특이한 점은 한국에만 있는 주거 공간인데, ‘반지하’라는 공간이 나옵니다. 거기서 오는 미묘한 뉘앙스가 있거든요. 저희가 불어 자막, 영어 자막을 만들 때 ‘반지하’라는 거에 해당하는 정확한 영어 또는 불어 단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한국 만의 독특한 뉘앙스를 가진 공간이죠. 분명히 지하인데 왠지 지상으로 믿고 싶어지는 공간이잖아요.”


지난 5월 칸에서 있었던 기자회견 당시 봉준호 감독이 이 이야기를 했을 때 회견장은 의도치 않은 폭소와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반지하에서 고생하며 찍었던 게 웃음으로 승화된 것일까. 사실 만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작품으로서 인정받고 축하받는 자리에서는 자신의 본래 계급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허다하다. 내가 가장 아끼는 아일랜드 그룹 The Cranberries조차 테러를 규탄한 심각한 노래 <Zombie>를 부를 때 어떤 콘서트에서는 그저 웃고 있으니까.


“왜 기다려왔잖아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네.”

서태지, <시대유감> 중


“레베르가 다르네.”, “역시... OO하는 클라스~” 일부러 발음을 뭉개서 ‘계급’을 미화하는 것은 우리 일상의 대화에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침투해 있다. 벌써 10년 전, 정말 짜증나는 존재라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엄친아’라는 말도 이제는 배경 좋은 신인들을 띄우는 데 아무렇지 않게 동원되는 긍정적 수식이 되었다. 그런 수식을 단 이들 중에 혹 누군가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 전까지 그 말은 마치 그가 번듯하게 잘 자란, 그래서 도덕적으로도 흠결이 없는 이미지로 묘연한 존재의 정체를 포장한다.


나는 유튜브 먹방을 보지 않는다. 특히 ‘벤쯔’로 대표되는 대식 먹방을 보면 너무나 슬프다. 그리고 그를 따라하다 병에 걸려 유튜버를 포기하게 되었다는 젊은이들을 볼 때면 시시포스 신화 같아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모두가 미쳐갈 것 같다는 서태지의 예언은 IMF가 끼얹은 찬물을 말리고 나서도 여전한 것 같다. 잘 살기 위해 보여주고, 보여주기 위해 많이 먹고, 그러다가 이상한 삶이 되어버리는 생태계의 구석. 그곳 역시 반지하의 일춘몽이다.


여기 밥의 계급성에 유감을 표하고 있는 한 작가가 있다. 몇 년 전 ‘오늘의 밥’이라는 전시로 처음 알게 된 임동현 작가의 <어떤 관계2>는 직관적이다. 스테이크를 써는 계급과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계급은 음식 앞에 절대 평등하지 않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극명한 대립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스테이크 도시락’이라는 상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텍스트를 씹는 것일뿐 진짜 스테이크라 할 수 없다. 누구나 주목할 만한 그림이지만, 사실 그 말고는 이런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작가노트 일부를 옮겨놓고자 한다.





일상 사물들을 소비하는 과정에는 신분상의 격차가 발생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존재하는 사물의 소소함과 일상의 평범함 탓에 사람들은 누구나 ‘보통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일상의 친숙함과 접근의 용이성이 착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음식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라서 비슷한 소비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음식은 사회의 물적 조건과 분배의 지형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신분 격차가 표현되는 영역이다.


모든 밥에는 생존 방식이 배어 있다. 그래서 나는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있다.”는 소설가 김훈의 글에 마음이 울린다. 어느 하청 노동자가 남기고 간 아이스백에 담긴 도시락과 밀린 월세로 자살을 선택한 일용직 노동자의 전기밥솥까지… 나는 밥벌이가 힘겹고 슬픈, 모든 이들의 힘겨운 밥한술을 기록한다. 나는 밥 먹기의 비애와 밥 먹기의 유흥을 의도적으로 비교한다.


한 끼에는 유회와 놀이 또는 고급정보교환과 사교가 있는 밥에서 생존에 치인 침묵의 밥, 허기를 신속히 때우기

위한 이동식 밥까지 한 끼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음을 나의 작업은 말했고, 말하고, 말해야 하고, 말할 것이다. 


현실의 밥에 비애가 있는 한 나는 목탄의 거침으로 밥벌이의 힘겨움을, 스크래치로 사람들의 상처와 삶의 흔적을, 캔버스 간의 비교로, 삶에 대한 기록을 그려왔고, 그리고, 그려야 하고, 그릴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 시선받지 못한 곳에서 먹는 끼니를 드러내어 그들의 존재를 담아내는 것이 내 삶의 입증이다.


배민영

살롱공간 취향관에서 편집장, 전시 디렉터,

시즌테마 기획자 등으로 일하듯 놀고 있다.

변화하는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위 글은 빅이슈 10월호 21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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