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가 말하는 ‘읽지 않을 권리’
글·사진제공 김차경
사람들은 새해에 사서에게 고해성사 겸 다짐을 말한다. 작년에 책을 많이 못 읽었으니 이제부터라도 도서관에 더 자주 오겠다고, 철학 고전을 읽겠다고, 혹은 독서모임에 참여하겠다고. 올해에는 꼭 성공하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사서로서 자신 있게 말하건대 다짐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 주고받은 대화가 생각난다. 늘 같은 주제의 책만 골라 읽는 이용자가 멋쩍은 듯 말했다. “아, 새해에는 책을 골고루 읽어야 할 텐데. 제가 편독이 너무 심하죠?” 그런가 하면 책을 골고루 읽는 이용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내년에 일기라도 쓸까 봐요. 저는 책은 많이 읽는데 기록을 안 해서 그런지 남는 게 없어요.” 나는 성실한 두 이용자에게 질문했다. “왜 골고루 읽어야 돼요?” “책 읽고 남는 게 없으면 안 돼요?” 정말 궁금하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다양한 분야의 책을 골고루, 꼼꼼히, 자주 읽는 게 좋다는 어떤 이상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효과 만점이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주는 독서법이란 게 과연 있을까? 아니 처음부터, 우리에게 책을 덜 읽거나 아예 안 읽어도 되는 권리는 없을까? 작가이자 사서였던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맞는 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책은 손을 내밀기만 하면 무조건 다른 세상에 데려가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사서가 되었건만, 도서관 일을 시작하자마자 책과 멀어졌다. 사서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낭만적 이미지-먼지 쌓인 서가를 거닐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는-를 누릴 시간 없이 바빴기도 했지만 의무로 시작한 독서에 권태가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이용자들은 초보 사서인 내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몰라서 대답하지 못하면 창피했다. 명색이 사서인데! 조바심이 생긴 나는 지독하게 재미없고 어려운 책 여러 권을 펼치고 덮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 그해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고, 책은 내게 매일 보지만 멀어진 친구처럼 되어버렸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우연히 집어든 책에 푹 빠져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읽고, 또 읽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독서의 폭이 슬금슬금 넓어져갔다.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읽었는데 어느 순간 확장된 내 세계를 쳐다보고선 깜짝 놀랐다. 독서법에 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닥치는 대로 읽어도 여전히 책을 통해 배우고 자랄 수 있구나, 하고. 지금은 책과 오순도순 잘 지낸다.
그래서 내게 새해맞이 독서 계획을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본인들이 읽고 싶은 책만 골라 읽으라고. 독서법 실천도 좋은데, 하기 싫으면 때려치우라고. 사서가 이래도 되냐 묻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조금 뻔뻔한 사서라 괜찮다고 대답해준다. 책 읽는 시간 동안 시시콜콜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느낀 즐거움, 감탄사, 삶의 의미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퉁쳐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꼭 나를 만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책이 있다. 그런 책은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게 하고,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책 읽기로 고심하는 당신이 그런 책을 만나길 바란다. 그전까지는, 독서가 당신에게 좋아하는 것들을 동동 띄워놓고 그 안에서 헤엄치는 듯한 행위였으면 좋겠다. 그 행위가 내키지 않는다면? 안 해도 좋다!
“그래서 뭘 어떻게 읽으라고요?”라고 반문할 이들에게 제안하는 뻔뻔한 독서법
1) 최악의 책 기록하기
이런 건 어떨까? 내가 재미를 느끼는 책을 골라 읽기. 기대와 다르게 너무 재미없었던 최악의 책은 기록해두었다가 나중에 책을 고를 때 피해 가기. (최악의 책이 인생의 어느 순간 최고의 책으로 바뀌게 될 때 이 기록이 유용할지도 모른다.)
2) 낭독: 소리 내어 함께 읽기
타인에게 내 목소리를 거친 텍스트를 들려주고, 타인의 목소리로 문장을 듣는 경험은 생각보다 재밌다. 처음에는 조금 쑥스러울 수 있지만. 의무적으로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모임을 찾아보자.
3) 고민의 실마리를 책에서 찾아보기
살면서 어떤 질문과 맞닥뜨렸을 때, 책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 독자에게 추천한다. 어디서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갈지 고민이라면 느티나무도서관의 ‘사회를 담는 컬렉션’을 권한다. ‘나는 왜 이 일을 계속하는가’, ‘내가 살 집은 어디에 있을까’, ‘혼자를 기르는 법’, ‘맛있게 취한 사람들’ 등, 살면서 한 번쯤은 고민하는 주제의 컬렉션 50여 종을 만날 수 있다.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읽고 싶지 않으면 그냥 덮기
마음에 들면 읽고 안 들면 읽지 않기. 작가 다니엘 페나크의 멋진 말처럼, 독자에게는 읽지 않을 권리가 있으므로.
김차경
회색 고양이의 사람 친구, 느티나무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는 중.
ck0623@neutinamu.org
위 글은 빅이슈 1월호 21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