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성현석
지난해 성전환 수술 이후 법원으로부터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정정 허가를 받았던 대입 수험생이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입시에 지원해 합격했다. 하지만 이 학생은 대학 입학을 포기했다.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자신이 반대 성(性)의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하는데, 그에 대한 숙명여대 재학생들의 반발이 거셌던 탓이다.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세력은 예전에도 있었다. 종교계 내부의 극우 세력이 주로 그랬다. 이번에는 달랐다. 여성주의를 내건 학생들, 전통적인 극우와 거리가 있어 보이는 학생들이 혐오를 부추겼다. 상징성이 아주 큰 사건이다.
이 수험생이 공부하고 싶었던 학문은 법학이었다. 그 역시 의미심장하다. 소수자, 약자는 연민과 공감을 원한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차가운 이성과 공정한 법치를 갈구하는 것은 대개 약자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 여러 면에서 다수파에 속하는 이들이 오히려 감성에 목마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은 까다로운 법의 논리가 귀찮다. 법은 정치인이 만드는데, 정치인은 선거에서 표를 많이 얻어야 한다. 따라서 법은 대개 다수파의 입장을 반영한다. 따라서 이미 다수파인 이들은 그저 평소처럼 행동하면 법을 어길 일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법의 존재를 일상에서 느낄 일이 적다. 그러다 가끔 법과 부딪힌다. 법이 다수파를 기계적으로 반영하기보다 소수까지 아우르는 원칙에 다가갈 때다.
소수파는 다르다. 대체로 다수파의 입장에 치우친 법은 소수파와 자주 충돌한다. 소수파에겐 법이 지닌 존재감이 크다. 누군가에겐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입학 절차와 관련 법 규정이 성소수자 수험생에겐 거대한 질문들이다. 하나하나 근본부터 따져봐야 할 대상이다. 누군가는 무심코 기입하는 공문서 속의 성별 표기가 성소수자에겐 두려운 도전이다.
‘성별 표기가 꼭 필요한가?’, ‘남성과 여성 항목만 있는 성별 표기 양식은 정당한가?’, ‘남성과 여성으로만 구별하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표기 방식을 언제까지 유지해야 하나?’…. 온갖 질문이 따라 붙고, 이들은 모두 현행법을 바꿀지 말지, 어떻게 바꿔야 할지 등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는 다시 우리를 규율하는 법과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낳는다.
다수파 입장에선 모두 귀찮은 질문들이다. 그들 입장에선 관행과 통념, 정서에 따른 행정 처리가 편리하다. 그들에겐 법과 규정, 절차를 근본부터 꼬치꼬지 따지는 일은 시간낭비이거나, 그저 골치 아픈 일이다. 이성과 논리에 비춰 우리를 규율하는 법을 점검하고 손질하자는 주장은 그들에 짜증스럽다. 그래서 다수파는 반(反)지성주의에 빠지기 쉽다. 법과 제도를 이성과 논리에 비춰 살피기보다, 다수의 정서에 공감을 부르는 정치와 행정을 선호한다. 그래서 다수파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자주 말한다.
소수파에겐 반지성주의가 재앙이다. 그들은 소수파이므로, 정서와 공감에 호소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대개 낯선 존재를 불편해한다. 소수파는 일상에서 만날 일이 적은 낯선 존재이므로, 다수파는 그들을 몰아내고 싶어 한다. 따라서 다수결의 원리가 적용되는 정치 공간에서, 소수파가 존중받기란 어렵다. 정서와 공감이 주로 작동하는 문화 영역에서도 소수파는 자리가 좁다. 문화 상품이 잘 팔리려면, 다수파의 정서에 다가가야 한다. 다수가 불편해하고 소수가 공감하는 문화 상품이 널리 팔릴 리는 없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언론 기업은 영향력 확대를 원한다. 그래야 광고 매출이 늘고, 재정이 살찐다. 그렇게 해야 좋은 기자를 많이 채용해서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 언론 매체의 기사가 영향력을 지니려면, 다수가 관심을 두는 사안을 취재해야 한다. 소수가 공감하는 문제는 취재에 들이는 노력 대비 효과가 적다.
결국 소수파가 기대기엔 차가운 법 논리가 낫다. 소수파라고 해서 유난히 감성이 무딜 리는 없다. 오히려 소수이므로, 감성이 더 예민해질 때가 많다. 소수파라고 해서, 골치 아픈 법 논리가 덜 짜증스러울 리 없다. 머리 쓰는 일은 누구나 피곤하다. 다만 소수파는 정서와 공감의 세계에서 배제돼 있으므로, 법 논리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들이라고 해서, 따뜻한 공감의 가치를 모를 리 없다. 의지할 곳이 논리뿐인 것이다.
성현석
언론인. 17년 남짓 기사를 썼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글을 써보려 합니다.
위 글은 빅이슈 2월호 22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