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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r 12. 2020

[스페셜] ‘밀레니얼’과 싸우는 밀레니얼 정치인

청년 세대론의 모호한 규정을 넘자


 채태준



올해는 아무래도 밀레니얼 세대인 국회의원이 탄생할 확률이 높아 보인다. 각 정당들도 공천 과정에서 청년 비율을 할당하거나, 또는 청년들에게 가산점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청년 정치인들은 자신의 출마를 “혈혈단신 아무것도 없는 청년의 자유로운 도전”으로 설명하거나, 지도부와 유권자를 향해 “새로운 세대의 진출을 허해달라.”고 요청한다. ‘젊고 유능한 30대의 새로운 정치’가 ‘노쇠하고 무기력한 여의도 정치’를 기필코 바꿀 것이라고 말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청년이라는 단어는 줄곧 대안 세력으로 호출되어왔다는 점에서 젊음을 통해 소구하는 이 청년 정치인들의 전략은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밀레니얼 세대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헌데, 이번 선거에 등장한 청년 정치인 중 다수에게는 뚜렷한 ‘의제’가 보이지 않는다. 2030 정치인 중 다수는 스스로가 당선되어야 하는 이유를 젊은 연령 그 이상으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개별 후보들이 지닌 역량의 탓도 있겠지만, 이는 한국 사회가 오늘날 청년을 호출하는 특정한 방식들의 효과이기도 하다. 세대 담론은 청년 정치인에게 역할을 할당하거나 제한한다. 특히 최근에 유행 중인 ‘밀레니얼 세대론’이 지닌 성격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지난 시기 ‘N포세대론’이 주로 경제적 약자로 청년이 지닌 곤궁한 처지를 조명해왔다면, 밀레니얼 세대론은 그들의 ‘문화적 감수성’이 앞선 세대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대세는 가난한 청년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청년으로 이동했다. 


문제는 밀레니얼 세대론이 ‘80년대부터 00년대 출생한 청년들은 앞선 세대와는 다른 가치관을 지녔다.’는 모호한 규정을 따른다는 점이다. 이 모호함은 세대라는 개념을 각자의 입맛에 맞춰 부를 가능성을 높인다. 오늘날 ‘밀레니얼 세대’는 거의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다. 청년 세대가 배부르게 자라서 ‘탈이념적’이라거나, IMF라는 경제위기를 겪은 배고픈 세대이기에 ‘경쟁’을 중요시한다는 등 청년들의 특징을 구성하는 배경은 때론 서로 모순된다. 그리고 ‘그들은 다르다’는 악다구니만이 남는다.


지난해 <90년생이 온다>의 흥행은 이를 잘 보여준다. 집권당의 대통령이 ‘90년대생을 알아보자’며 선물한 이 책은, 동시에 그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한 용례로 사용되었다.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청년 세대에 관한 ‘진실’로서 사용되었던 책이지만, 실상 책 속을 들여다보면 청년에 관한 서술은 분열적이다. 이들은 무기력하지만, 동시에 활기찬 혁신의 주체다. ‘상시적 구조조정의 공포’ 속에서 청년들이 ‘9급 공무원’에 열중한다고 언급하다가도, 갑자기 얼굴을 싹 바꾸고 ‘과감한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원하는 이들로 90년대생을 거론한다. 이 책은 청년 세대에 관한 어떤 편견들의 난잡한 아카이빙 이상으로 볼 수 없다.    

 


<90년생이 온다>가 말하는 ‘우리’의 정체

청년에 관해 실상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90년생이 온다>에서 기성세대는 그저 ‘나’를 재확인한다. 경쟁하는 청년들과 민주화에 힘썼던 ‘우리’, 공정을 말하는 청년들과, 평등을 외쳤던 ‘우리’. 개인주의자 청년들과, 공동체를 중요시했던 ‘우리’. 이 이분법 속에서 청년의 반대편으로 설정된 ‘나’를 말이다. 언론사 지면을 통해 공유된 이 책에 대한 기성세대들의 서평에는 ‘반성’으로 포장된 나르시시즘이 짙게 배어 있다. ‘오, 이 책을 통해서 민주화 투쟁에 목숨 걸었던 내가 비로소 경쟁에 목을 매는 아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간증은 청년은 다르다는 신앙과, 오늘날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해주는 기성세대의 거울로서 청년 담론을 보여준다. (중략)


다가오는 총선에서 밀레니얼 세대와 싸우는 청년 정치인을 보고 싶다. 모호한 이 세대론이 갈음하는 청년 내부의 다양한 격차들, 학력·성별·지역 등에 따른 불평등을 질문하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이를 통해 밀레니얼을 끊임없이 재구성해내는 청년 정치인을 보고 싶다. 앞서 언급한 ‘모호함’은 동시에 청년 정치인에 대한 의미 재구축을 위한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청년 정치인은 세대 담론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청년은 다르다’는 세대 담론에 기생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름의 활동을 통해 스스로가 ‘청년 정치인’임을 증명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여의도 입성을 위한 전략으로서 ‘청년’이라는 기표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신 그들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의정활동을 통해 어떠한 방식으로 ‘(대안으로서) 청년’임을 입증할 것인지를 선언해야 한다. 어떤 청년 후보들은 이미 ‘페미니스트 후보’라던가 ‘교피아를 청산할 후보’, ‘빌려 쓰는 사람들의 후보’라는 자신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채태준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청년의 사회참여를 고민하는 친구들과 ‘청년오픈플랫폼Y’에서 활동 중.     


위 글은 빅이슈 3월호 22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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