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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r 22. 2020

[서울게이행복주택] 단정하고 자유롭기


 정규환

사진 김찬영



최근 한 회사의 최종 면접을 보고 떨어졌다. 채용 과정에서 인상 깊은 건 ‘단정한 자유복’을 입으라는 지침이었다. 단정함과 자유로움 사이의 그 기준이 애매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본 뒤 무난하게 정장을 입는 편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요즘은 블라인드 면접과 더불어 지원자의 개성과 능력을 중요시한다고 하지만 위에 계신 분들은 여전히 보수적이라는 이유였다. 그날 참석한 모든 면접자들 역시 단정하지만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튀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무언의 압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실무 면접 때 입은 흰 드레스셔츠 대신 조금 더 캐주얼해 보이는 연보랏빛 셔츠에 네이비 도트 넥타이를 맸다.


실패의 쓴맛을 보면서 서른을 맞이하다니.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된 작년 이맘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거 같지만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만 30세가 됐기에 구차한 변명거리가 사라졌다. 지난 20대를 돌아보면 문제지를 펼쳐놓고 그럴듯한 답을 골라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만족스러운 답안지를 제출하지 못하는 수험생이 된 기분이었다. 마치 이제 2교시 시험이 끝나고 곧 종이 울릴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설거지를 하면서 ‘평생 한 직장에서 일한 사람과 평생 한 사람과 연애한 사람 중 누가 더 불행한지’에 대해 남자 친구와 짓궂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로부터 “그래도 한 사람과 오래 사랑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라는 낭만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나와 비슷해서 좋은 경우가 있고 또 나와 정반대라서 좋은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서로 느낌만으로도 잘 통하는 기분이 좋고, 후자는 내가 내 멋대로 상대방을 오해할 여지가 없어서 좋다. 그는 후자에 가까웠다. 특히 서로가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둘 다 일에 집중하면 삶의 여유가 없을 테고, 둘 다 일이 불규칙적이면 매달 나가는 월세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테다. 동거를 하는 데 한 명이라도 꾸준하게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큰 위안이 된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하지만 나는 한 명의 상대와 평생 연애하는 게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까웠다. 어쨌든 한 명의 상대와 6년 동안 연애하며 다양한 직장에서 일을 했기에 최악은 아닌 것 같다는 자조 섞인 대답을 내뱉었다. 한번은 매해 사회 분야별 트렌드를 제시하는 베스트셀러를 우연히 보고 놀란 적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말 내가 그 책이 전망한 대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3년 전엔 ‘욜로’를 외치며 전 재산을 털어 유럽 배낭여행을 간 적도 있고, 2년 전엔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퇴사를 해서 한동안 고장 난 나침반처럼 갈팡질팡했었다. 누군가 그렇게 살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때론 내 의지라고 생각한 것들도 어쩌면 예측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라는 허무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어쨌든 30대의 출발점에 서보니 어차피 ‘답정너’인 세상에서 스스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많은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살았다. 세상을 조금 만만히 보면서 그런 달콤한 꿈들을 꾸는 것이 어쩌면 ‘희망’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자의 반 타의 반, 이 기준 저 기준에 나를 맞추려다 보니 정작 어떤 내가 더 자연스러운지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리는 것 같았다. 20대 때는 어떤 일이든지 하고 싶었는데 30대가 되니 ‘내가 어떤 일을 하면서도 가장 나다운 모습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30대엔 단정하게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면접을 봐도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그

런 여유를 가지고 싶다.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모습 속에서도 깨끗한 손끝처럼 단정함이 돋보이는 그런 사

람 말이다.


정규환 

프리랜서 에디터. 20대의 절반 동안 영화사, 영화제 및 

각종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매거진 <GQ>, <뒤로>,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 등에 성소수자 관련 에세이를 기고했다. 

인권 운동을 하다가 만난 게이 파트너와 5년째 동거 중이다.


위 글은 빅이슈 3월호 22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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