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성현석
정치 혐오의 긴 뿌리
국회의원 정수 확대를 주장하는 이들이 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정치 혐오 정서가 워낙 강한 탓이다. 정치 활동을 일종의 ‘잉여 짓’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전쟁과 빈곤의 역사가 깊고, 경제 성장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밥 먹여주지 않는 일에 대한 멸시도 심했다. 평화나 인권처럼 산업과 관련이 적어 보이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게 밥 먹여 주느냐.”라는 조롱이 나오곤 했다. 정치 역시 돈을 벌기보다, 돈을 쓰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반감을 갖는 이들이 흔했다. 정치인에 대해 ‘하는 일 없이 세금만 축 낸다.’라며 비난하는 이들이 지금도 흔하다. 실제로 정치인들은 늘 바쁘다. 하는 일이 많다. 그럼에도, 하는 일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돈을 버는 일이 아닌 탓이다.
기득권 세력의 통치술도 한몫했다. 권력을 누리거나 가진 게 많은 이들은 자기네 약점이나 잘못이 드러날 때마다, ‘우리나 우리를 비판하는 이들이나 다 똑같다.’라는 메시지를 퍼뜨렸다. 군사독재 정권은 특히 심했다. 그들의 비리가 드러날 때면, 야당이나 민주화 운동 세력까지 싸잡아 비난하곤 했다. 이런 식의 물 타기는 논리적으론 타당하지 않다. 큰 잘못과 작은 잘못, 권력에 비례해서 책임도 더 커야 할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정치 그 자체가 아예 나쁜 짓이 받아들여진다.
국회의원 수 묶어두고 선거제도만 바꾼 대가
그래서 국회의원 수를 늘리자는 이야기를 도무지 꺼낼 수 없다. 결국 국회의원 숫자가 고정된 상태에서 선거제도만 바뀌어버렸다. 그러니까 4월 총선을 앞두고 온갖 혼란이 벌어진다. 여당과 제1야당은 각각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위성정당이란, 그 자체로 꼼수인데, 위성정당 후보를 뽑는 과정에서 다시 문제가 생긴다. 어떤 문제가 있어서 공천을 받을 수 없었던 이들이 국회에 진출하는 우회로 역할을 위성정당이 하고 있다. (...중략)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도 정치 혐오의 결과
그런데 허점이 있다. 지역구 의석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 다수파 정당이 위성정당을 만드는 경우다. 위성정당은 지역구 후보자는 내지 않고, 오로지 비례대표 의석만 노린다. 여당 지지자가 지역구 후보는 여당을 고르고, 비례대표는 여당의 위성정당을 택할 경우, 여당은 종전 선거방식보다도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위성정당이 사실상 여당이라는 전제에서다. 여당 대신 제1야당을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이는 일종의 꼼수이므로, 국회에서 제도 도입 논의가 진행될 당시엔 다수파 정당의 체면 때문에라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분위기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지금, 위성정당이 실제로 창당해서 선거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내다보지 못한 것은 정치권과 언론, 시민사회 전체의 잘못이다.
지나친 정치 혐오 정서가 국회의원 숫자 확대를 막았고, 그래서 생긴 혼란이 다시 정치 혐오를 부추긴다. 사람 셋만 모이면 정치가 이뤄진다. 정치가 없는 사회란 불가능하다. 정치를 혐오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회에 대한 혐오와 다름없다. 정치 혐오에 맞서야 한다. 적어도 2024년 총선에선 국회의원 숫자가 지금보다 훨씬 늘어나야 한다. 그래야 지금껏 정치에서 소외됐던 이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도 생겨난다. 그래야 정치에서 배제됐던 이들의 목소리가 입법과 예산 배정에 반영된다.
위 글은 빅이슈 4월호 22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