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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Apr 16. 2020

[밤에 읽어주세요] 밤과 음악


글. 김현


*222호에서 이어집니다



1

그는 잉크가 군데군데 번진 편지를 다시 접어 책상 서랍 깊숙이 넣었다. 검푸른 하늘이 펼쳐진 새벽이었다. 재스민 향기. 해변을 지나온 신선한 바람이 흰색 레이스 커튼을 흔들며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는 잠든 연인의 곁으로 다가가 연인의 얼굴을 오래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길을 잃었다. 다른 사랑은 없어요. 연인의 얼굴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고 사랑을 이야기할 수는 없나니. 너무 컴컴해, 불을 켜줘, 눈을 떠줘. 그는 연인을 흔들어 깨울 뻔했으나 그리하지 못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연인의 눈동자가 너무도 슬프다는 사실. 그에게도 다른 사랑을 얻을 자격이 있었다.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는 전축의 볼륨을 조금 높이고, 펜촉에 잉크를 찍어 작별이란 늘 말할 수 없이 가까이 와 있다고 쓴다. 그녀는 미끄러지듯 쓰이는 문장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펜대를 단단히 부여잡는다. 조심해. 방심하면 사랑에 관한 문장이 너를 집어삼킬 거야. 마그리트 도나디외는 만약 자신이라면 마리앙바드에서 날아온 은밀한 편지에 답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연인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 그것이 사랑을 지킨다.


그는 홀로 집을 나와 맨발로 해변을 걸었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자신을 사로잡았던 q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환희에 차 있던 우주를. 바다에 가까운 쪽으로 다가갈수록 그의 발에 색색의 모래 알갱이들이 달라붙었다. 그는 사랑에 이끌리는 중이었다. 한 사내가 저 멀리에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그 사내에게서 q의 형상을 보았다. 신기루였으나 q의 등에 붙은 모래를 털어줄 때 느꼈던 피부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q는 그를 부드럽게 안을 줄 알았고 거칠게 다뤘다. q는 이제 겨우 인생의 절반을 살았을 뿐인데도 그는 q에게서 발견하곤 했다. 살아남았다는 느낌을. q에게는 예고된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를테면 q의 저택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검고 큰 개와 표정을 알 수 없는 가정부가 있었고, 그곳의 수영장은 사시사철 낙엽 하나 없이 깨끗했으며, 그 푸른 물속에서 Q는 종종 익사를 유사경험하곤 했다. 잠시 후, 붉은색 조깅팬츠를 입은 늙은 사내가 그의 곁을 지나쳐 갔다. 사내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해변의 끝을 향해 나아갔다. q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파도는 잔잔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바라보며 다시 서랍을 열었다. 편지를 펼쳤다.


올래요?

갈까요? 


(...중략)


위 글은 빅이슈 4월호 22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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