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난 ‘n번방’
글. 이은의
“그들은 처벌받지 않겠지요. 그러니 처벌하지 않으실 거라면 그들의 신상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성범죄에 대한 강력 처벌 요구는 언제나 있었지만 지난 3월 20일, 200만 명이 넘게 동의한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의 이 문장은 조금 다르다. 신상이라도 알려달라는 외침은 성범죄 앞에 언제나 ‘각자도생’을 강조해온 한국 사회가 불러온 좌절이다. 시민들은 왜 ‘n번방’에 가담한 전원의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가? 이 공포가 허상이 아닌 이유를,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법률 대리인으로 활동해온 이은의 변호사가 설명한다. -편집자 주
사실 그간 수많은 n번방 사건에 무감했던 한국의 대중이다. n번방 사건이 뭐가 충격적이냐고 되묻고 싶다. ‘소라넷’으로 대표되는 웹하드 문제는 어떤가. 웹하드 영상물 중 성범죄로 짐작되는 영상의 비중이 다르기 때문인가? 아동과 청소년 피해자가 n번방보다 적기 때문인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이 되는 해 1월 1일부터는 피해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들은 보호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대중의 외면을 먹고 자란 웹하드
웹하드 같은 공간이 판을 치는 데에는 대중의 외면이 큰 역할을 했다. 그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보는 시각은 냉소적이었다. 거기에는 ‘네가 찍었잖아.’ 혹은 ‘남편 아닌 남자랑 섹스 했잖아.’라는 손가락질이 깔려 있다. 디지털 밀레니엄 시대로 넘어왔으나, 성범죄 피해자를 ‘보호할 여성’과 ‘보호할 필요가 없는 여성’으로 나누는 구시대적 시각은 여전했다. 사람들은 성범죄 피해자는 따로 있다고 믿고 싶어 하면서 책임은 고스란히 피해자 개인의 몫으로 돌려왔다. (중략)
곽현화 씨 사례도 마찬가지다. 곽 씨가 해당 영상을 빼달라고 요청하고 감독이 이를 수락한 대화 녹취록도, 곽 씨가 영상 송출에 항의하자 감독이 사죄하는 대화 녹취록도 있었다. 하지만 법원은 감독에게 무죄를 판결했다. 재판 중에도 많은 사람이 그 영화를 다운로드 해 관람했다. 배우가 성범죄 피해물이라고 호소한 영상이다. 감독이 무죄판결을 받았으니 괜찮은가? 그들은 성범죄물을 보면서 피해자를 비난하고 조롱했다. 곽 씨가 피해를 공개적으로 호소 한 후에도 촬영물을 본 사람들이 n번방 가입자들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도 처벌하지 않았다
불과 1~2년 전에도 피해자가 원하지 않은 영상을 촬영해 돈을 번 자들이 있었고,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영상을 본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처벌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n번방 사건은 결국 우리 사회가 함께 만든 결과물이다. (중략)
맞다. 디지털 성범죄에 있어 한국 사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끼우면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급한 대안이 아니라, 깊은 고민과 제대로 된 개선이다. 그 시작점에 많은 사람이 n번방 가입자 신상 공개를 요구한 이유를 들여다보는 일이 있다.
이은의
변호사. <예민해도 괜찮아>를 썼습니다.
위 글은 빅이슈 6월호 22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