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빅이슈코리아 Jun 22. 2020

[서울 미감 유감] 시트지 건축, 납작한 세계


사진. 신지혜



처음 발견한 시트지 건축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서쪽에 선 교통순찰대 건물이다. 2층짜리 철골구조의 교통순찰대 건물은 돌담 위에 기와가 얹어진 이미지가 인쇄된 시트지로 덮여 있었다. 실사를 인쇄한 듯 재질감과 그림자가 실감 나게 표현된 시트지의 이미지는 생생하고, 납작했다. 감쪽같아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뻔뻔함에 웃음이 났다.


그 후로 서울 곳곳에서 시트지 건축을 보았다. 명동 길거리의 키오스크에, 주택의 불법 증축한 창고에, 음식점의 주차원 대기실에, 운현궁의 자판기에, 상점과 공사장 가림막에 벽돌이나 돌, 나무 담장 무늬를 인쇄한 시트지가 붙어 있었다. 이렇게 ‘진짜’를 흉내 낸 시트지를 붙여 마감한 건물에 나는 ‘시트지 건축’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실패를 예상하는 ‘시트지 건축’


시트지를 떼어내도 건물은 무너지지 않는다. 시트지는 건물이 서 있는데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단지 무언가를 표현할 뿐이다. 건물의 구조에 영향을 받지 않는 외벽은 어떤 모습이라도 될 수 있었다. 외벽에 무엇이든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수평으로 긴 창을 가진 건물도, 전면이 유리인 건물도 지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구조로부터 독립한 외벽을 점점 더 납작하고 매끈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 방식이 가장 저렴하게 구현된 결과가 시트지 건축이다. (중략)


흔히들 건축을 경험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공간을 경험하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건물의 외관이 중요하다. 시트지를 붙이기로 한 사람도 아마 알 것이다. 누구도 시트지를 붙인 벽을 벽돌이나 돌을 쌓아 만든 벽으로 착각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처음부터 실패할 줄 알고 하는 건축적 행위에 유희와 좌절이 함께 있다. 시트지 건축을 그냥 웃어넘기기엔 이 납작한 세계가 아쉽다.     


신지혜 

아빠가 지은 집에서 태어나 열두 번째 집에서 살고 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일한다. <0,0,0>과 <건축의 모양들 지붕편>을 독립출판으로 펴냈고, <최초의 집>을 썼다. 건축을 좋아하고, 건축이 가진 사연은 더 좋아한다. 언젠가 서울의 기괴한 건물을 사진으로 모아 책을 만들고 싶다. 건축 외에는 춤과 책을 좋아한다.


위 글은 빅이슈 6월호 22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즐겨찾기 in 서울] 용산 가족 공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