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빅이슈코리아 Jun 23. 2020

[칼럼] 학병의 나라에서 박제가 된 위안부


글. 성현석     

사진. 양경필


※ 편집자주_문맥상 ‘정신대’ ‘위안부’의 용어를 필자가 작성한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아들과 딸>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었다. 1992년 10월에 방송을 시작했는데,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아들 이귀남(최수종)과 딸 이후남(김희애)이 이끌어가는 이야기다. 귀남과 후남이라는 이름에서 드라마의 주제가 드러난다. 각각 귀한 아들, 아들 뒤에 있는 딸이라는 뜻이다. 극심한 남아선호 분위기를 반영했다. 나이가 같고, 학문에 대한 재능과 열정은 딸이 더 뛰어났지만, 대학 교육의 기회는 아들에게 먼저 돌아갔다. 집안의 지원은 오로지 아들에게만 쏠렸다.  

    

<아들과 딸>의 시대, 딸은 취업을 선택하지 않았다

드라마 특유의 과장은 있었겠으나, 이런 내용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은 당시에 없었다. 아들과 딸을 둔 서민 가정에선 익숙한 풍경이었다. 공부를 더 잘하는 딸이 진학 대신 취업을 택하고, 아들은 대학에 가는 경우가 흔했다. 대학을 나온 여성을 뽑는 일자리가 적던 시절이므로, 집안에선 암묵적인 합의가 생기곤 했다. 딸이 번 돈을 아들 학비에 보태는 대신, 아들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 가계를 일으킨다는 식이다.  딸 입장에선 진학 대신 취업이라는 결정은 선택이 아니었다. 부모가 윽박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그래서 스스로 선택한 모양새여도, 실제로는 구조적 압력이 있었다. (중략)


돌아온 학병이 전한 흉흉한 소문

<아들과 딸> 방영 한 해 전인 1991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내에서 이뤄진 첫 공개 증언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46년이 지난 뒤였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의 사연은 46년 동안이나 묻혀 있었다.


이 문제는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가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1925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았던 윤 전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해방 직후 느꼈던 당혹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해방이 되자 일제강점기에 학도병(학병)으로 끌려갔던 이들은 대부분 돌아왔다. 돌아온 학병들이 윤 전 교수에게 흉흉한 소문을 전했다. ‘여성근로정신대(정신대)’로 끌려간 소녀들이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소문이 사실일까?’, ‘끌려갔던 소녀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중략)


대한민국을 설계한 학병 세대

하지만 한국 사회의 침묵은 여전했다. 그사이, 돌아온 학병들은 사회의 주류가 됐다. 해방 직후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턱없이 부족했던 한국에서 학병 출신은 금세 주류 엘리트가 됐다. 장준하 <사상계> 발행인,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김수환 추기경 등이 대표적인 학병 출신이다. 학병 세대이되 징집을 피했던 이들까지 포함하면, 정부 수립 초기 엘리트 대부분이 포함된다. 김건우 대전대 교수는 <대한민국의 설계자들-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학병세대’는 주로 1920년 전후 다섯 해 정도에 출생한 이들로, 실제로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이라고 할 만하다. (…) 너무 많은 이들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했기에 나라 만들기의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데도 ‘몸을 더럽히지 않은’ 이들을 찾기가 힘들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학병세대’가 시대의 중심에 등장했다. (…)”   

(중략)


<여명의 눈동자> 속 장하림의 나라에서 윤여옥은 박제가 됐다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에도, 그들은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었다. 최근 정의기억연대 논란으로 두 차례 기자회견을 했던 이용수 할머니를 놓고 온갖 이야기가 나온다. 이 할머니가 1998년에 치른 위령제 관련 기사가 다시 회자된다. 이 할머니가 타이완의 위안소에서 학대당하던 시절, 할머니를 구해줬던 일본군 장교를 위한 위령제다. 이 기사를 다시 거론하며, 할머니를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끔찍한 일이다. 그들은 여전히 ‘위안부’를 없는 존재 취급한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듬해인 1992년에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방영됐다. 남성 주인공인 장하림(박상원)은 학병 세대의 전형이다. 도쿄제국대학 의학부를 다니다 학병으로 참전했다. 이후에는 OSS(미국 CIA의 전신) 요원도 거쳤다. 해방된 한국에서 주류 엘리트가 될 수 있는 조건이다. 여성 주인공인 윤여옥(채시라)은 ‘위안부’였다. 드라마에선 둘이 같은 비중으로 다뤄진다. 윤여옥 역시 박제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 묘사돼 있다.


하지만 드라마와 현실은 달랐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학병들은 ‘위안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들이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에게 전한 이야기가 46년 지나서 사실로 확인됐다. 하지만 학병 세대는 조국에서 승승장구하면서도 ‘위안부’에 대해 침묵했다. 학병 세대가 설계한 나라에서도 딸은 여전히 차별당했다. 아들은 공부시키고, 딸은 일본제국의 강제동원에 내몰던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90년대 드라마 <아들과 딸> 속 설정과 닮았다. 이 드라마 방영 당시 방송사를 이끌던 이들은 학병 세대의 자식 또래였다. 다시 한 세대가 지났다. <여명의 눈동자> 속 윤여옥에게 <아들과 딸> 속 이후남의 굴레를 덮어 씌워서는 안 된다.           


성현석  언론인. 17년 남짓 기사를 썼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글을 써보려 합니다.                


위 글은 빅이슈 6월호 22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울 미감 유감] 시트지 건축, 납작한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