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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Aug 04. 2020

[욕아일기] 엄마가 되고 나니 ‘엄마’를 닮아간다

왜 나는 엄마의 오답 노트를 베껴 쓰고 있을까


글 | 사진. 박코끼리     


요즘 말을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하는 아들이 정말 귀엽다. 오늘은 “기저귀 가져와.”를 알아듣고 뒤뚱뒤뚱 기저귀를 들고 오는 이 시시한 일에 마치 기저귀를 발명해낸 것 같은 감격으로 유난을 떨었다. 물 달라고 애타게 “무- 무-” 소리를 낼 때도, 안 된다고 말하면 삐죽거리며 시무룩해질 때도, 언제 이렇게 자랐나 싶어 이따금 가슴이 미어진다. 하지만 역시 가장 예쁠 때는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을 때. 가만히 지켜보다 결국 참지 못해 뽀뽀를 잔뜩 퍼붓고 아이의 정수리를 닳도록 쓰다듬고 있으면, 하릴없이 왈칵,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도 나를 이렇게, 내가 이렇게나 예뻤을까.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끝내 좋아하지 못했던


레이디 버드: 엄마 날 좋아해? 

엄마: 물론 사랑하지.

레이디 버드: 나도 알아. 근데 사랑하는 거 말고, 날 ‘좋아’하냐고.

- 영화 <레이디 버드> 중에서     


엄마를 생각하면 늘 가슴 한복판에 여우비가 내린다. 틀림없이 사랑하고 사무치게 그립지만 엄마는, 내가 좋아하고 닮고 싶은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 같은 엄마가 될까 봐 두려웠고 여전히 두렵다.


엄마는 어느 자리에서나 제 몫을 해내며 인정받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주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엄마로서 엄마는, 너무나 엄격하고 무정한 감독관이었다. 먹이고 씻기고 입히는 엄마로서의 역할은 그 누구보다 충실했고 완벽했지만 자신이 정한 기준을 자식에게도 그대로 들이밀며 매순간 끝없이 비교하고 강요했다. (중략)


엄마가, 나쁜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냥 나에게 엄마라는 사람이 그랬듯, 엄마에게 나도 사랑하지만 좋아할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던 것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열흘 전쯤, 쥐고 있던 어린 날의 상처와 의문들을 대화로 풀어보고 싶었지만, 내가 주섬주섬 어렵게 꺼낸 옛 기억들은 시한부 환자의 암담한 기분을 들쑤실 뿐이었다. 엄마와 나는 끝내 서로 쥐고 있는 퍼즐을 맞춰보지 못한 채 영영 헤어졌다. 엄마의 육아는 그렇게 끝났다.      


사랑하는 만큼 좋아하고 싶은데


요즘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의 모습을 내가 듬성듬성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엄마의 오답 노트를 보며 그렇게 다짐했는데, 어째서 나는 그토록 질색했던 엄마의 표정과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이것들이 어디에 심어져 있다가 깜빡이도 없이 튀어나오는 건지. 이제 겨우 넘어지지 않고 걷는 법을 깨친 15개월 아기에게 나는 도대체 뭘 얻자고 언성을 높이며 열을 내고 있는 건지, 의아한 눈으로 멀뚱히 바라보는 아들의 얼굴에 정신이 번쩍 들어 몇 번이나 가슴을 쳤더랬다. 


나도 모르게 엄마와 동기화된 이 감정 체계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부모 자식 간에 서로 기대하는 모습으로 자라고 늙어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서로를 응원하며 좋아하는 법은 어디서 배워야 할까. 그냥 툭 털고 일어나면 되는 일에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을 뿐인데, 이것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그저 기가 막힌다. 내 아이만큼 제발 사랑하는 만큼 좋아하고 싶다. 내가 주는 사랑을 당연하게 공짜 취급하며 여기저기 흥청망청 쓸 수 있도록.      


박코끼리  

하나라도 얻어 걸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쓴다. 요즘은 일생일대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주로 참을 忍을 쓰고 있다.              


위 글은 빅이슈 8월호 23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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