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송희
일러스트. 조예람
휴일에 빗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는데 우유가 떨어졌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뭘 살 때만 부지런해지는 나는 벌떡 일어나 눈곱도 안 떼고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우산을 들고 슬리퍼를 찍찍 끌고 집 앞 편의점을 향했다. 얼마 전 새로 장만한 귀여운 비닐우산을 들고, 집에서 입고 있던 편한 티셔츠에 호주에서 사 온 하늘색 슬리퍼를 신고 물웅덩이가 고인 길을 걸으니 왠지 중요한 일을 하러 집을 나선 것처럼 기분도 유쾌해졌다. 그래, 중요한 일이고 말고. 내 냉장고에 우유가 없어서 라떼를 만들어 먹을 수 없다니 용납할 수 없지.
비를 머금어 풀내음이 짙어진 여름 가로수 길을 지나 편의점 유리문을 활기차게 열어재끼던 나는 그만 “헐…”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유리창에 비친 여자는 호랑이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호랑이가 그려진 우산을 들고 표범이 알록달록 새겨진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등에 호랑이 문신을 새겼다고 해도 무리 없어 보이는, 온몸을 호랑이 무늬로 휘감은 그녀는 구파발 살쾡이파의 행동대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활동명도 “어흥”일 것 같은, 호랑이 티셔츠와 호랑이 우산과 범 무늬 슬리퍼를 한 그 여자가 바로 나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사실 남들 보기에 ‘쓸데없어’ 보이는 걸 자꾸만 사들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좋아하는 게 아주 광범위하고 다양하다는 것이다. 나는 아라비안 핀란드 그릇도 좋아하고 레트로한 유리컵도 좋아하고 영국풍의 홍차용 찻잔도 좋아한다. 할머니 옷장에서 유물로 발견될 것 같은 빈티지 스타일도 좋아하지만 세련된 도시 여자처럼 보일 심플한 셔츠도 좋아한다. 부들부들한 면 소재의 패브릭도 좋아하지만 발리풍의 라탄도 좋아한다. 방은 비좁은데 사놓은 러그는 많아서 두 겹으로 겹쳐놓고 쓴 적도 있다. 집에 놀러 왔던 한 친구는 빈틈없이 겹쳐진 러그를 보고 이러다 방바닥이 질식하겠다고 놀렸다. (중략)
사실 나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자기가 뭘 좋아하는 지 제대로 모른다.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니 어슴푸레 특이하고 예뻐 보이면 ‘나는 이걸 좋아해.’라는 착각에 빠져 지갑 문을 아낌없이 여는 것이다. (중략) 호랑이를 좋아하지도 않는 인간이 호랑이 우산과 티셔츠와 슬리퍼를 동시에 사들일 수 있나? 하지만 나는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내 몰골을 보기 전까지 내가 호랑이 캐릭터 물품이 여러 개라는 인지조차 못 하고 있었다. (중략) 게다가 지금 당장 스타일리스트로 전업해도 충분해 보이는 내 옷장 속 티셔츠와 원피스에는 다른 동물들도 여러 종 서식하고 있다. 옷이 워낙 많으니 각종 동식물이 옷장에서 사파리를 이루어 사이좋게 살고 있다.
소비는 지루한 일상에 작은 이벤트
좋아해서, 갖고 싶어서 검색 끝에 찾아내 구매하는 게 아니라 뭐라도 사고 싶어서 쇼핑몰 사이트를 둘러보다가 세일 중이라, 가성비가 괜찮아서, 그럭저럭 귀여워서, 첫눈에 예뻐서… 이런저런 이유로 사들인 물건들을 보면 내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취향이라는 게 사실 별 볼일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공통점도 없고 맥락도 없고, 그저 그때그때 눈에 띄어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해서 사들인 것들이 대다수다. 게다가 이렇게 작은 거라도 사지 않으면, 퇴근 길 문 앞에 택배 박스라도 쌓여 있지 않으면 내 일상에는 이벤트 따위는 없다. 소비가 잦은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생일도 아닌데, 뭐 특별한 날도 아닌데 그렇게도 자주 나에게 선물을 준다. 왜냐면, 내가 나에게 안 주면 아무도 나에게 선물 따윈 주지 않으니까! 매일 선물을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도 문제다. 분명 그 사람은 당신의 인감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다.
그런 작고 반짝이는 이벤트라도 매일매일 나에게 열어주지 않으면 혼자인 삶에 어떤 즐거운 일도 생기지 않으니까 자꾸만 나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다. 오늘 일이 조금 힘들었으니까, 이 스트레스는 샤워 후 에어컨을 켜고 맥주를 한 캔 딴다고 해소되는 게 아니니까 습관처럼 쇼핑 사이트에 접속한다. 바빠서 하루라도 확인을 못한 사이 예쁜 물건이 발매되고, 초특가 세일까지 하고, 더불어 품절까지 된다면 그 노릇을 어쩐단 말인가! 진짜 희귀하고 예쁜 물건은 재입고도 안 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