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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Aug 12. 2020

[스페셜] 아르헨티나 국경에서, 12월의 여름


사진. 최이삭



2010년 12월 9일, 그리고 현지 시각 밤 8시 무렵. 당시 스물다섯 살이던 나는 침대버스를 타고 영원한 여름의 대지 아르헨티나의 국경 지대를 달리고 있었다. 그곳의 여름은 ‘여름’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어떤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짧은 우기가 지나면 두 뼘씩 자라 있는 산세베리아, 너무 달아서 입에서 셔벗처럼 녹아내리는 사과, 원근감도 없이 막연하게 새파란 하늘. 그 완전한 여름 안에서 종종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울곤 했다. 세상엔 그런 여름도 있다.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의 한인방송국에서 반년간 봉사활동을 했던 나는 파견 기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아르헨티나를 여행했다. 첫 목적지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아순시온에서 약 20시간 거리다. 늦은 오후 아순시온 국제 버스터미널을 출발해 붉은색 흙이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두어 시간 달리다 보면 기차 간이역만 한 작은 출입국관리소가 나온다.




내 젊음 최고의 날

버스 타이어 자국을 따라 이틀 정도 걸으면 아순시온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뭘 먹고 마셔야 하지? 비관적인 가정을 하며 입국심사대로 걸어가는 동안 숙소를 떠나기 직전 30분 만에 싼 내 배낭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생각했다. 1988년도판 중남미 여행 가이드에서 찢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지하철노선도, 유심칩이 없는 아이폰 3G,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픽션들>, 영어-스페인어 사전 정도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영어도 스페인어도 못하는데 어쩌지. 겁에 질려 뒤돌아본 풍경에는 오로지 여름과 대지뿐이었다. 문명이 0.1cm 간격으로 심겨진 도시와 마을을 떠나니, 나라는 존재는 자연의 광대함 위에 잠시 드리워진 작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중략)


영화 <해피 투게더>(1997) OST를 들으며 창밖으로 펼쳐진 끝없는 초원을 홀린 듯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 식사 때가 됐다. 따뜻하게 데워진 식사 키트를 들고 교대운전 비번인 운전사가 침대칸으로 올라와 “pollo? carne?(닭고기? 소고기?)” 하고 물었다. “carne!” 내가 아는 50개 정도의 스페인어 단어 중 가장 자주 사용하고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자신 있게 내뱉었다. 참고로 그때 내가 외우는 유일한 스페인어 문장은 “Yo No puedo hablo español”이었다. “나는 스페인어를 못합니다.”라는 뜻이다.


오후 8시가 넘으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밤으로 향하는 하늘의 끝이 대지와 가까워지다 마침내 맞닿으며 붉은 지평선을 만들었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자유로웠고 혼자 남미의 거대한 밤에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했다. 아주 잠시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중략)



그 어느 거대한 밤 앞에서도 강할 수 있기를!

무사히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고 팜파스 지역인 산타로사, 이구아수폭포가 있는 푸에르토이과수까지 들르니 12월 24일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는 파라과이 국경 지대의 버스터미널 근처 낡은 호텔에서 보냈다. 언제 세탁했는지 알 수 없는 꿉꿉한 침구 위에 샤워타월을 깔고 누워 성탄일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쏘아 올린 끝없는 폭죽 소리를 밤늦도록 들었다. 자정이 막 넘었을 즈음 호텔 매니저가 방 문을 두드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가 샴페인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창문을 열고 아마도 마지막일 국경 지대의 여름을 흠뻑 들이마시며 다시 혼자 잔을 높이 들었다. 4,200km 여정의 끝을 축하하며, 나에게 술을 부어준 다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축복하며.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오늘도 혼자 건배를 하지만 창밖에는 지평선도 초원도 없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라는 한남 뉴타운 재개발을 기다리는 낡은 지붕들과 멀리 성전처럼 빛나는 용산구청뿐이다. 그러나 서른다섯 살의 나에게는 이 풍경이 퍽 아름답게 느껴진다. 재개발 착공 전에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나가야 하는데 내 전세 보증금으로는 용산구청이 보이는 곳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천천히 잔을 비우며 애써 기도해본다. 그 여름을 잊지 않기를. 그 어느 거대한 밤 앞에서도 강할 수 있기를. 그리고 어느 12월에 그 땅을 다시 밟을 수 있기를.


최이삭 

국회 보좌진, 여성단체 활동가, 잡지기자 등으로 일했습니다. 7년 동안 7개의 직장을 다닌 이력서가 여권 같은 사람. instagram @isaskchoi


위 글은 빅이슈 8월호 23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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