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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Aug 11. 2020

[밤에 읽어주세요] 낮에 꾸는 꿈


글. 김현


1

꿈을 꿨다. 여름 안에서.


드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야자수, 파란 하늘, 패러글라이딩, 흰 파도 소리. 상의를 벗고 반바지 차림으로 개와 함께 달리는 사람. 형형색색의 비치파라솔이 늘어선 해변에서 볕을 쬐고 당신과 비치볼을 주고받으며 물놀이하고 선배드에 누워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을 펼쳐 든다. 잠에서 깼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미온수로 샤워하며 중얼거렸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어젯밤에도 많은 사람이 버스나 기차, 배와 비행기를 타고 정거장에서, 역에서, 항구에서 멀리, 공항에서 더 멀리 떠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선풍기 앞에 앉아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면서 아 하고 소리 내어봤다. 지난밤 요란했던 빗소리는 어디쯤 가 있을까. 밀크 글라스에 드립백 커피를 걸어두고 물을 끓이며 꿈에서 본 책을 떠올렸다. 한 권의 이야기.



작가인 ‘나’는 꿈의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빼 현실로 가지고 온다. 그 책에는 글을 쓴 이의 이름도, 제목도 적혀 있지 않다. 책이라는 물성만을 간직한 종이 묶음. 아무것도 쓰이지 않아서 누구나의 이야기로 읽히는 책.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을 앞장서는 그 ‘불가능한 책’은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말했다. 책 속에 있는 고독은 온 세상의 고독이라고. 언젠가 통유리로 된 카페 창가에 앉았다가 우연히 보았다. 참새 한 마리가 아니 작고 가벼운 참새 한 마리가 청아한 소리로 지저귀며 나뭇가지와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는 모습을. 그게 지금도 두고두고 기억나는 건 몇 개월 사이 인류가 더 고독해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날, 나는 참새를 보는 무거운 인간에 관한 시를 썼다. 참새에게 행복에 관해 물을 순 없으므로. 그 ‘가벼운 참새’ 이야기는 ‘죽은 참새는 무겁다.’로 시작한다. (중략)


꿈과 책과 시라는 단어에는 모두 ‘예측할 수 없음’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커피는 진하게 한 잔. 가방에 노트와 펜을 넣어 들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마스크 착용이 필수가 된 이후, 언제부턴가 사람 없는 아파트 단지나 인적이 드문 골목을 걸을 때면 재앙이 닥친 세상과 그 세상에 홀로 남았다고 믿는(그러나 결국 또 다른 생존자들이 나타나는) 영화 속 인물이 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고독할 틈이 없는 사람에 관해서. 외로움 덩어리인 그는 가방에 허먼 멜빌이나 마크 트웨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역경 소설을 챙겨 넣고 미지의 생존자를 찾아 떠난다…. (중략) (어떤 물음처럼) 큰비가 지나가고 난 뒤의 주말 아침은 유달리 고요하다. 또 다른 결말을 준비하는 세계처럼.


2

일몰이 지기 시작하자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본명)는 창문을 열고(재스민 향기), 라디오 주파수를 93.1MHz에 맞추고, 와인을 병째 준비하고, 새 종이를 타자기에 끼워 넣었다. 담배는 흐르게 한 모금. 다시 사랑할 준비가 됐나요, 그녀는 속삭인 후에.



(침묵)

- 목소리를 잃어버렸나요?

- 네, 그래요.

- 말하고 있잖아요?

-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에요. 빌려 온 거예요.

(중략)


(침묵, 그러고 나서)

프랑소와즈 로제는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남편 자크 페이더를 이렇게 회상해요.

“밤에는 깨어 있고 낮에는 잠이 들었던 사람. 그래서 우리는 꿈의 하루를 완성할 수 있었어요.”


김현

읽고 쓰고 일한다.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산문집으로 <걱정 말고 다녀와> <질문 있습니다> <아무튼, 스웨터>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이 있다.


위 글은 빅이슈 8월호 23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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