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성현석
가장 가난한 마을에 재난이 닥쳤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래서 학교 강당으로 대피했다. 그곳에 빌 게이츠가 나타났다. 가난한 이들에게 위문품을 나눠주는 모습을 언론에 보이고 싶었던 까닭이다. 가난한 이들이 복작대는 강당 안에 빌 게이츠 한 명과 기자 몇 명이 들어섰다. 그렇다면, 강당 안에 모인 이들의 평균 소득은 얼마일까?
어지간한 재벌 총수보다 높게 나온다.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인 곳의 평균 소득이 그토록 높다니, 어이없는 결과다. 이른바 평균의 함정이다. 전체 가운데 일부가 두드러지게 높은 값을 나타내면, 평균이 아주 높아진다.
비슷한 사례가 아주 많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은 현대중공업 그룹의 최대 주주다. 그는 무려 7선 의원을 지냈다. 28년 동안, 국회의원이었다. 그가 국회의원이던 시절, 정치인 재산 내역이 언론에 공개될 때면, 국회 주변에선 늘 불만이 나오곤 했다. 정 이사장의 재산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국회의원 재산 평균값이 너무 높게 발표됐다. 국회의원 입장에선, 그렇지 않아도 정치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쁜데 실제 이상으로 부유한 이미지가 덧칠되니 불만을 품게 된다. 물론, 국회의원 가운데서 부자가 아주 많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도를 과장하는 보도 역시 잘못이다.
평균의 함정과 중위 값
이처럼 평균값은 집단 전체를 대표하는 값이 되기 어렵다. (중략) 소득이나 자산의 분포에 대해서는, 그래서 평균값보다 중위 값을 쓰는 게 낫다. 어떤 모임 안에 7명이 있다고 하자. 그들의 소득을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운다고 하자. 4등이 중간이다. 그의 소득이 중위 값이다. 소득의 중위 값을 중위 소득이라고 부른다. 가난을 다루는 복지 행정에선 평균 소득 대신 중위 소득을 주로 활용한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중위 소득은 얼마일까. 아주 어려운 문제다. 소득은 여러 종류로 나뉜다. 일해서 번 돈, 근로소득이 있다. 세금을 내기 전 기준으로 근로소득의 중위 값은 대략 월 220만 원이다. 전체 근로소득자를 한 줄로 세웠을 때, 중간에 해당하는 사람의 소득이다. 이는 근로소득자 가운데 절반이 한 달에 220만 원 이하를 번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산 소득과 이전소득이 있다. 이자, 배당금, 임대료 등은 자산 소득이다. 상속, 증여, 연금, 정부 지원금 등이 이전소득이다. 이들을 모두 합쳐야 개인의 소득을 파악할 수 있다. 근로소득은 파악이 쉽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특히 가구 소득을 계산할 때는 자산 및 이전소득을 잘 따져야 한다. 가구가 보유한 자산 가운데 일부는 당장 현금이 되지 않더라도, 소득이 생긴 것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인 가구의 중위 소득을 정확히 파악하기란, 몹시 어렵다. 실제 값과는 늘 차이가 있다. (중략)
기준 중위 소득이 결정하는 복지 수준
보건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는 충돌이 벌어지는 자리다. 지난달 31일, 중앙생활보장위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내년도 기준 중위 소득이 발표됐다. 내년 소득을 올해 발표한다니 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기준 중위 소득은 일종의 추정치다. 언론에 크게 소개되지는 않았으나, 이날 발표된 기준 중위 소득은 복지 관련 활동가와 연구자들에겐 뜨거운 관심사였다. 기준 중위 소득을 계산하는 방식이 올해부터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는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계산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놓고 계산한다.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는 면접 조사에 더해서 각종 행정 자료까지 활용했으므로 정확도가 더 높다. 전문직 등 부유층 소득이 잘 반영된다. 따라서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놓고 계산한 올해 기준 중위 소득은 종전보다 크게 높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복지 수혜자 범위와 혜택 규모가 늘어난다. 이 같은 계산 방식 변경은 사회 양극화 완화를 위한 개혁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기준 중위 소득의 기준 인상률을 정하기로 했다. 경제 상황이 나빠졌을 때, 기준 중위 소득이 하락해서 복지가 줄어드는 일은 없게끔 하려는 조치다. 역시 개혁 조치다.
그래서 결국 내년도 기준 중위 소득은 얼마나 올랐나? 4인 가구 기준 내년도 기준 중위 소득은 487만 6290원으로 결정됐다. 3인 가구는 398만 3950원, 2인 가구는 308만 8079원, 1인 가구는 182만 7831원이다. 올해보다 2.68% 포인트 오른 값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결정 과정에서 격론이 있었다. 2.68%라는 인상률은 기본 인상률을 1%로 잡고, 보정수치를 더한 값이다. (중략)
1% 차이, 누군가에겐 지옥과 천국 사이
1.76%와 0.76%의 차이. 고작 1%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보건복지부가 벌이는 복지 사업 가운데 무려 76개가 기준 중위 소득을 수급 기준으로 활용한다. 예컨대 저소득층을 위한 생계급여는 정부가 파악한 가구 소득 인정액이 기준 중위 소득의 30% 이하여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4인 가구는 내년 소득 인정액이 월 146만2887원 이하여야 생계급여를 받는다. 1인 가구는 월 54만 8349원 이하여야 한다.
홀로 사는 누군가는 정부가 인정한 소득이 월 55만 원이었다. 그는 생계급여를 받을 수 없다. 55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한다. 기본 중위 소득을 정하는 자리에서, 기본 인상률을 높이자는 의견에 조금만 더 무게가 실렸다면, 그의 삶은 달라질 수 있었다. 55만 원으로 사는 이에게 그 차이는 지옥과 천국의 거리다.
숫자를 놓고 다투는 자리,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잊었을 수 있다. 애초 이런 자리에 모이는 이들은 대개 그 결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부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나온 결정은 누군가의 삶을 바꾼다. 그렇다면 자신이 영향을 받지 않는 결정에 참가하는 이들은 어떻게 하면 제 결정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까. 스스로 알아서 느낄 방법이 있을 리는 없다. 대안은 여론의 압력뿐이다. 복지 정책은 복잡한 숫자를 다룬다. 그래서 까다롭다. 하지만 우리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쟁점은 대개 그렇다. 어느 것이나 까다로운 법률과 복잡한 숫자라는 베일에 감춰져 있다. 시민과 언론이 베일을 벗겨야 한다. 그리고 까다로운 쟁점에 직접 관심을 가져야 한다. 1% 차이로 지옥에 떨어졌던 누군가를 구출하는 길은 그뿐이다.
성현석
언론인. 17년 남짓 기사를 썼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글을 써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