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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Aug 26. 2020

[돈 크라이] 나쁘지 않은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분하는

나쁘지 않은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분하는 연습


글. 정문정

일러스트. 조예람


어릴 때 나는 나쁘지 않은 것을 가지는 데 익숙했다. 그것들은 다시 말하면, 딱히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 좋아요.” 또는 “전 괜찮아요.” 같은 말을 자주 하며 살아왔다. 선택지가 별로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 어차피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내면화하게 되기에 무기력해지기 쉽다. 고만고만하게 별로인 주어진 선택지를 보다가 이내 심드렁해지고 마는 마음.


좋아하는 것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잘 몰랐다. 사춘기를 맞이한 중학생 때 엄마를 졸라 간신히 만 원을 받아낸 뒤 헐레벌떡 시장에 간 날이 있었다. 전까지는 한 살 차이 언니가 입던 옷을 물려 입기만 했기에 혼자 쇼핑을 간 건 처음이었다. 적은 돈이나마 있기만 하면 마음껏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옷이 쌓여 있는 걸 보고 압도되었다. 직접 골라본 적이 없으니 어떤 것이 어울릴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날 결국 뭐라도 사서 돌아왔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흥분됐던 마음이 무색하게 막상 옷 가게에 도착해서는 우두커니 있던 모습만 뚜렷하다.


해볼 기회가 생기더라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것은 옷뿐 아니었다.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은 일어났다.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선택해본 적 없는 사람. 고만고만한 선택지가 다인 줄 알았던 사람. 항상 절실해서 일단 뭐라도 택하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없을 거라 여기는 사람. 가난한 사람은 상황에 자기를 맞추는 것이 습관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때 듣는 ‘착하다’는 평가를 내면화해 지나치게 양보하다 길을 잃곤 한다. 그때 내가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굳이 인연 맺지 않아도 될 이가 인생에서 있었다.

     

나쁘지 않으면 사귀고 좋지 않아도 만나는

20대 중반까지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만 좋아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에 기쁜 것이 아니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기뻤다. 그러니 특별히 나쁘지만 않으면 사귀었다. 좋아하지 않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옷도 없으니 이거라도 입고 나가자는 기분으로. 고백해온 사람 중에서 딱히 나쁘지 않은 사람을 사귄 뒤엔 연애를 끝내는 것도 문제였다. 그만둬야 한다는 걸 진작 직감했으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질질 끌었다. 이 사람이 나를 아직 좋아하는데,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관계를 끝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심지어 헤어지고 싶다는 내 감정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뒤틀린 조바심도 이럴 때마다 등장했다. ‘이 사람과 헤어진 후에도 이만큼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나타날까?’라는. 훗날, 행복하지 않은 연애를 꾸역꾸역 지속하는 여자들이 이와 비슷한 속내를 자주 토로하는 걸 보고 안타까웠다. 이랑의 음악을 듣다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노래 가사를 듣고 웃어버린 건 그 시기 간절하고도 애매했던 심정이 떠올라서였다. 이랑은 이렇게 노래한다.


누가 나보고 예쁘다고 하면

난 그 말만 듣고 그럼 나랑 사귀자고 했어

그런 식으로 만난 남자만 해도 벌써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 다섯 명 여섯 명 일곱 명 여덟 명

내가 왜 그랬는지 내가 왜

그러니까 너도 함부로 나한테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그렇게 말하지 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지도 못하면서

나 예쁘니? 어디가? 진짜?

그럼 나랑 사귈래?

     

백 퍼센트의 선택을 해봐야 원하는 것을 알게 된다  

물건이든 상황이든 대충 선택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인간관계처럼 정말 중요한 것에서조차 자기에게 어울리는 것을 찾지 못한다. 나 또한 전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싸면 일단 사고 봤다. 특히 옷이 그랬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가격뿐인 건 살 때만 뿌듯하고 주구장창 보관만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옷장을 열면 웬 거적때기만 있나 의아해하며 싼 옷을 사러 가는 반복. 이상하게도 사면 살수록 물욕이 생겼다. 더 좋은 것이 있을 것 같고 또 다른 것을 사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서. 많이 찾아보는 만큼 사고 싶은 것도 자꾸만 생겨났다. 싸게 사면서 돈을 아낀다고 위안하는데 남는 것이 없어 자주 사게 되는 악순환.


서른 즈음부터는 무언가를 살 때 예산 안에서 온전히 마음에 드는 것만 샀다. 가격과 디자인, 기능이 백 퍼센트 마음에 드는 것은 찾기 어려우므로 자연히 카드를 잘 꺼내게 되지 않는다. 대신 한번 산 것은 자주 오래 쓴다. 지금 쓰는 것에 만족하니 무언가를 더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나 쇼핑에 들이는 시간이 별로 없다. 이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열 개를 사는 비용과 마음에 드는 것 한 개를 사는 비용은 결국 비슷하고, 과정에 드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오히려 전자가 손해일 수 있다.


연인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 딱히 나쁘지 않다는 이유로 대충 곁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다. 외로워서 특별히 원하지도 않는 이를 주변에 두면 에너지를 낭비할 뿐 아니라 진짜로 좋은 사람이 주변에 왔을 때 여석이 없어 놓쳐버린다. 게다가 한쪽이 ‘만나준다’ ‘맞춰준다’고 생각하는 기울어진 감정의 추가 작동하는 관계는 금세 끝을 보기 쉬우며, 이런 마음으로 관계에서 갑으로서 행세한 이는 사랑이 끝나도 배우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나쁘지 않아서 하는 결정을 계속 하다 보면 나중에는 좋아서 한 것이라 스스로를 속이다가 어느 순간 진짜로 믿어버리게 되고, 이후에는 좋아서 하는 선택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나쁘지 않은 것과 좋은 것은 완전히 다르다.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주어진 것에만 만족하는 세계를 한 발짝 나와보면 이제까지와 다른 풍경이 보인다. 자신을 대충 처리해버리지 않을 때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너무 쉽게 만족하거나 빨리 체념하는 습관 때문에 쓸데없이 옆자리만 차지하는 것들이 있는지 체크해볼 필요가 있다. 예산 안에서 심사숙고해 물건을 고르듯, 옆에 있는 사람을 택할 때도 최선을 다해 지금 가능한 최고를 봐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사랑을,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한 번이라도 알게 되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정문정

쓰는 사람.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냈다.

인스타그램 @okdommoon


조예람

사소한 주변을 담은 ‘Around Ginger’의 일러스트레이터.

인스타그램 @around_ginger


위 글은 빅이슈 8월호 23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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