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ㅣ사진. 신지혜
‘보광동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르네상스 호텔 사거리’에서 내려 3분만 걸으면 회사에 도착한다. 택시를 탔을 때도 “보광동 종점 가주세요”, “르네상스 호텔 사거리 가주세요”라고 하면 대부분 부가설명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지에는 보광동 종점도, 르네상스 호텔도 남아 있지 않다. 이 시설들은 현재 말로써만, 그리고 시설이 존재하던 시절을 공유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보광동 종점은 1950년대부터 삼각지와 보광동을 오가는 버스의 종점이었다. 2009년까지 삼성여객자동차 주식회사의 버스 차고지로 쓰였다. 버스 종점이 사라지고도 한동안은 버스정류장 이름이 ‘보광동 종점’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보광동 주민센터’로 바뀌었다. 보광동 종점이 있던 사거리 주변에는 주민센터, 우체국, 파출소 등 관공서가 모여 있고 상권도 발달했다. 종점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오밀조밀한 가게들이 밀집한 동네에서 종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종점 사거리 근처엔 ‘종점 순댓국’, ‘종점 숯불갈비’처럼 상호명에 종점이 들어간 가게들이 남아있다. (중략)
랜드마크의 새 주인공은 누굴까
르네상스 호텔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맞춰 준공되어 2017년에 철거되었다. 지상 24층의 호텔 건물은 그 자리에 선 내내 역삼동의 랜드마크로서 기능했다. 테헤란로와 언주로가 교차하는 사거리는 건물이 사라진 현재도 ‘르네상스 호텔 사거리’로 불린다. 이 호텔은 건축가 김수근이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에서 스케치한 작품 중 하나라고도 알려져 있다. 코너를 곡선으로 처리한 밝고 부드러운 하늘색 수평 띠가 르네상스 호텔의 트레이드마크다. 주변에 비슷한 외관의 닮은꼴 건물 두 개가 더 지어지며 르네상스 호텔 사거리의 인상을 굳혔다. ‘김수근 키드’인 건축가 장세양, 승효상이 각각 설계한 삼부 오피스 빌딩과 서울상록회관 건물로, 현재는 서울상록회관만 남아 있다. 2017년, 2조 원에 매각된 르네상스 호텔 부지에서는 현재 37층짜리 업무, 호텔, 상업 등 대규모 복합용도 시설이 건설 중이다. 새로 지어진 건물은 역삼동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어 사거리의 이름을 차지할 수 있을까?
건축물은 사라졌지만
종점 숯불갈비처럼, 상호명에 영향을 미친 시설이 사라지고 가게 이름으로만 남은 경우는 또 있다. 혜화동에 있는 법대문구와 사대문구가 그렇다. 지금의 혜화동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자리엔 해방 후부터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동하기 전까지 서울대학교 법대 건물이 있었다. 학교는 이사를 갔지만, 법대 앞에 있어 이름 붙인 ‘법대문구’는 그 자리에 남았다. 법대문구는 주인이 바뀌어 현재도 운영 중인데, 예전에 문구점을 이용했던 법대 졸업생이 찾아오는 일도 종종 있다고 한다. 법대문구 옆엔 서울사대부설초·중학교에서 이름을 따온 ‘사대문구’도 있었는데, 2015~2016년 사이 문을 닫았다. (중략)
사대문구, 법대문구는 내가 거리를 걸을 때 상호명, 버스 정류장의 이름이 주변 지역이나 건물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호기심을 갖고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욕탕 앞’ 정류장(‘은평02’번 버스 노선이 지나는 정류장. 정류장번호 12564)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주변에 아직도 목욕탕이 남아 있는지, 사라졌다면 언제 사라졌는지, 목욕탕이 마을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또 현재 목욕탕을 기억하는 사람이 동네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궁금해진다. 나만의 서울 지도는 현재와 기억, 상상을 더해가며 차곡차곡 두꺼워진다.
신지혜
아빠가 지은 집에서 태어나 열두 번째 집에서 살고 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일한다. <0,0,0>과 <건축의 모양들 지붕편>을 독립출판으로 펴냈고, <최초의 집>을 썼다. 건축을 좋아하고, 건축이 가진 사연은 더 좋아한다. 언젠가 서울의 기괴한 건물을 사진으로 모아 책을 만들고 싶다. 건축 외에는 춤과 책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