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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Aug 28. 2020

[커버스토리]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

빨강 머리 앤에 대하여…


글. 김송희


<앤과 다이애나>


“헐, 너도 앤 좋아해?” 뱃지나 그립톡, 휴대폰 케이스나 다이어리 같은 물건들 중 <빨강머리 앤>이 그려진 것을 지닌 여자 사람을 만나면 신이나서 묻곤 했다. 그렇게 물으면 "야, 너두?"라고 눈을 반짝이며 우리는 무언의 미소를 지으며 금방 친구가 되곤 했다. 함께 앤을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앤'에 빙의해서 수다쟁이가 되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음은 물론이다. 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기에 그토록 많은 상품들이 출시되고, 제목과 표지에 빨강머리 앤이 새겨진 책이 끝도 없이 출간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앤'은 누구나 친구가 되게 해주는 엄청난 파워를 가진 소녀임은 틀림없다.


<앤과 다이애나>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캐나다에서 이 소설을 처음 발표한 것은 1908년이었다. 이후 일본의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작에 참여한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1985년에 제작됐고 한국에서는 20년에 걸쳐 6번이나 재방영됐다. 80년대에서 2018년에 이르기까지, 시리즈가 방영될 때마다 한국의 소녀들은 고아 소녀 앤이 초록 지붕으로 입양을 가 마릴라, 매튜의 가족이 되어 성장하고 친구를 사귀고 어른이 되는 것을 보며 눈물 콧물을 쏟았더랬다. 퍼프 소매 원피스가 입고 싶다고 해도 허영이라며 밋밋한 옷만 지어주던 마릴린, 앤이 매튜 아저씨에게 선물 받은 퍼프 소매의 갈색 드레스, 다이애나와 앤이 손을 맡잡고 눈을 감은 채 ‘영원한 맹세’를 하던 장면 등등. 고난이 닥쳐와도 대책 없이 긍정적이던 씩씩한 소녀는 한국의 소녀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사실, 어른이 되어 다시 본 <빨강 머리 앤>은 지나치게 수다스러워 ‘마릴라의 두통 원인이 앤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내일은 즐거운 일이 생길 거라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아침이 좋다는 소녀의 무한 긍정은 무기력한 어른에게는 더 이상 위로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빨강 머리 앤은 삶의 모퉁이마다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기도 하며, 낯선 사람과 쉽게 친구가 될 수 있게 도와준다.


얼마 전 업무 상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이가 빨강머리 앤 이모티콘을 쓰는 것을 봤을 때도 어찌나 반가웠던지 갑자기 손뼉이라도 마주칠 기세로 “기자님도 앤 좋아하세요?”라고 물었더랬다. 앤의 어떤 부분이 좋냐는 내 질문에 그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가 취업준비생 때 면접스터디에 가면 ‘당신은 너무 범생이처럼 생겨서 탈락이다, 염색을 좀 해서 ‘날티’를 내보’라는 조언을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회사 면접 때는 염색을 하고 갔지요. 면접 며칠 앞두고 미용실에 가서 ”면접을 보려 하니 깔끔하게 염색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미용사 언니가 제 피부색과 어울리는 색을 해준다며 레드빛으로 염색을 해줬어요. 상당히 마음에 들었고 잘 어울렸어요. 운 좋게 면접에도 합격했어요. 그런데 회사 온 뒤 몇 년간 ‘빨강머리 앤’이란 별명을 들어야 했지요. 어떻게 회사 면접에 빨간색으로 염색을 하고 올 수가 있느냐는 거예요. 당시 동료 면접자들이 절 보고, ‘정말 우주에서 온 애 같았다’, ‘내가 저 사람보단 낫다’ 생각했다는 거예요. ㅋㅋ 회사에 들어온 지 8년 된 지금도 전 좀 특이한 애로 통한답니다. 웃픈 사연이에요. 빨갛게 머리할 수 없는 사회에서 명랑하게 살아가는 앤을 응원합니다!! 빨강머리앤이 가진 그런 소수자성에 저는 매력을 느낍니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게 중요하니까요.”(한겨레 김미향 기자)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생길지 기대가 되서 아침이 늘 좋다고 했던 소녀. 가난하기 때문에 상상할 여지가 있어 위안이 된다고 했던 아이, 나 이외의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고,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확신했던 <빨강머리 앤>을 사랑하는 데에는 달리 이유가 필요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빨강 머리 앤이 되고 싶었고, 또 이미 그 아이의 진실한 친구였으니까.


위 글은 빅이슈 8월호 23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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