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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Sep 04. 2020

[밤에 읽어주세요] 낮은 짧고 밤은 얕다


글. 김현



0

밤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낮에는 일어난다. 일테면,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을래요.


1

Y는 혼자서 공원을 걸었다. 걷다 보니 넓은 공원을 세 바퀴나 돌았고, 조용히 석상 앞에 서게 되었다. 앞에서 보면 새의 얼굴, 옆에서 보면 사람의 얼굴, 뒤에서 보면 그저 바윗덩어리인 석상은 ‘사랑의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Y는 석상의 부리이면서 콧구멍인, 바위의 만질만질한 부위를 매만졌다. 다른 연인들처럼 영원한 사랑을 기도하진 않았다. 석상은 오랜 시간 숨죽이고 있는 듯했다. 낮에는 침묵하고 밤이면 비로소 입술을 여는 사랑. Y는 사람들이 모두 잠들면 눈을 깜박이고, 책장을 넘기고, 편지를 쓰고, 걷는, 다가오는, 멀어지는 석상을 생각했다. 그 석상의 이름은 O다. O의 낮은 길고 Y의 밤은 깊다. Y는 O의 이마에 처음으로 손등을 댔던 날을 떠올렸다. 작은 마리아, 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적힌 종이 위에 O의 이름을 쓴 날이었다.


‘O…다시 만날 때는 깨어 있길.’

(중략)


2

X월 X일. 비.


Y. 오지 않을 생각이라면 오겠다고 해줘요.

0. 밤은 짧고 낮은 길어요.

     

침묵, 그러고 나서


I. 종말까지 아홉 시간이 남았다면 무엇을 할래?

0. 꿈을 꾸겠지.


침묵


Y. (사랑을 숨길 순 없어요.)

I. (나는 당신까지 사랑하겠어요.)

(중략)


3

낮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밤에는 일어나요. 일테면, 혼자 있고 싶어요. 그러니 제게로 오세요.

 

김현 

읽고 쓰고 일한다.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산문집으로 <걱정 말고 다녀와> <질문 있습니다> <아무튼, 스웨터>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이 있다.


위 글은 빅이슈 9월호 23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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