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문정
일러스트. 조예람
무조건 서울에 가야 한다, 서울 가야 답이 있다, 같은 말을 주문처럼 외우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간절했던 서울에 살게 되면서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여기저기 ‘시내’가 있다는 것이었다. 전에 살던 대구에서 ‘시내에서 만나자’는 말은 동성로를 의미했다. 그런데 서울은 여기저기가 다 시내였다. 광화문, 압구정, 한남동, 성수동, 이태원, 연남동 등등.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공연을 빠르게 볼 수 있고 독립영화관이 여럿 있고 각종 강의나 문화 행사가 자주 열리는 곳. 새로운 외식 브랜드나 복합 문화공간이라 할 만한 곳은 서울에서만 1호점을 열었다. 한동안은 신기한 것과 새롭고 좋은 것이 모두 서울에서만 시작되는 듯해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서울살이의 좋은 일 중 최고로 좋은 것은 더 이상 듣지 않게 된 지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 ‘너 특이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연락처가 추가된 지인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다양했다. 출신 지역도, 직업도, 직장도, 취미도, 선호하는 삶의 방식도. 지방에서는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가 연결되기에 평균적인 삶과 튀지 않는 사람에 대한 선호가 컸다. 여기서는 덜 눈치 보고 좀 더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도 괜찮구나, 나는 안도했다. 과거와 멀어진 곳에서, 과거와는 상관없이 살아가기 위한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다.
인생의 주요 시기를 드라마 시즌제처럼 나눌 수 있다면 크게 세 개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부모의 자식으로 사는 시즌 1, 독립해 사는 시즌 2, 자식의 부모로 사는 시즌 3 정도로. 첫 번째 시즌의 가장 큰 비극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극도로 적다는 것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런 때 이곳에서 이런 아이템을 받고 태어나 부모의 취향과 육아 방식에 맞춰 성격이 정원처럼 다듬어진다. 주변의 관계 또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주어진 것이다. 동네 친구와 동네에서 다니는 학교와 학원에서 알게 된 친구들. 그런 면에서 사람이 스무 살 이전에 이룬 성취라고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자기 노력 덕이라 하긴 어렵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같은 논리로, 스무 살 이전의 실패라고 하는 것 또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겠지.
인생의 장르를 바꾸고 싶다면
내가 관심을 가지는 건 본인의 주체성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즌이다. 첫 번째 시즌에서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극소수였다면 두 번째 시즌에서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원하는 것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세 번째 시즌에서는, 아이를 언제 몇 명을 낳고 어떤 방식으로 키울지나 아예 부모가 되지 않는 선택지를 고를 수도 있으니 잘못되었을 때 남 탓을 하거나 핑계를 댈 여지가 현저히 줄어든다. 그중 궁금해서 찾아다녔던 것, 비슷한 고민을 안은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떠올린 건 이 질문이었다. 시즌 1에서 주어진 장르와 주변, 캐릭터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시즌 2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릴러를 코미디로, 코미디를 어드벤처로, 어드벤처를 로맨스로 바꾸고 싶어졌다면?
지금까지 내가 찾은 방식은 이러하다. 첫째, 주변인을 바꾸고 늘릴 것, 둘째, 돈을 써서 새로운 것을 배울 것. 셋째, 자주 등장하는 장소(배경)를 바꿀 것. 이 세 가지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월급을 받게 되면 버는 돈의 최소 10프로는 자신을 위해 재투자하고, 돈을 써서 새로운 것을 배우다 보면 거기서 알게 된 사람들과 친분이 생겨난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자극을 받아 원하는 일을 꾸준히 잡고 있다 보면 이직을 하거나 바라던 커리어를 가지게 될 확률이 커진다. 조연과 배경이 바뀌면 주인공은 그에 맞춰 새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회초년생의 인간관계는 주로 학교 친구와 회사 생활에서 알게 된 이들로 구성된다. 회사 생활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동질성이 있지만 낯섦에서 오는 자극이 없다. 회사에 대한 이야기에는 공감대가 많지만 개인적인 커리어에 대해서나 내밀한 고민은 이야기할 수 없다. 반면 학창 시절 친구와는 처지가 너무 달라져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야가 제한된다. 과거 추억을 공유하며 익숙함을 매개로 유지하는 관계에서는 변한 내 입장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 오래 알았던 사람이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있으니까. 새로운 삶을 원한다면, 이처럼 답답하지만 익숙함이 있는 관계의 영향력은 일상에서 약간 줄이고 낯선 곳을 찾아 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기분 좋은 어색함이 있는 곳으로.
20대에 내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던 것은 책에 대한 것이었고, 되고 싶은 것은 글 쓰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이야기는 주변의 누구와도 하기 어려웠다. 그럴 때 회사에 다니면서 새로운 자극을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닌 게 도움이 되었다. 너무 개인적이라 말 못한 고민, 감성적이어서 부끄럽게 여겨지는 것을 함께 소설 공부하는 친구들과는 할 수 있었다. 아무도 관심 없을 거라고 생각해 속으로만 생각한 것도 독서 모임의 멤버와는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릴 수 있었다. 핵심만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 긴 글을 읽고 길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이처럼 취향과 관심사를 기반으로 만나는 살롱 문화가 요즘 인기를 얻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웠다. 만약 소설가가 꿈이라면 일단 글쓰기 모임에 등록해서 한 장이라도 써보고, 같은 마음인 사람들의 것을 보거나 지도해주는 사람의 말을 들으며 언저리에라도 가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식으로 배운 것은, 그런 식으로 알게 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남으니까. 여기서 핵심은 이런 분위기에 있다 보면 ‘내가 어떻게 해.’라던 마음이 ‘생각보다 해볼 만한데.’로 옮겨지는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나가는 것 말고는 어떤 의무도 없다
우리는 성취에 대해 말할 때 개인의 의지를 주로 강조하지만,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의 호의와 낙관성이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성인이 되며 알게 된 세상이 하나 있었는데, 내가 몰랐거나 고군분투해 알아낸 것을 어떤 이는 쉽게 터득하고 있다는 거였다. 비결은 바로 사람 사이 사회(관계) 자본이라고 하는 연결망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주변에 조언을 해줄 사람이 있는지의 여부와 역할 모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보는 것의 난이도에 따라 꿈의 크기가 결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 다니다 로스쿨에 가고 싶어졌을 때, 로스쿨에 재학 중인 사람을 주변에서 소개받아 조언을 얻거나 주변에 비슷한 도전을 한 사람을 볼 수 있다면 나도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기가 쉽다. 관계 자본이 풍부하면 이를 통해 더 많은 경험치를 쌓고, 인사이트를 얻어 새로운 도전을 하는 선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반면, 상황이 열악한 친구들은 빈약한 관계 자본을 갖고 있다. 이들 주변에는 조언을 해줄 사람이 터무니없이 적고 다양한 삶을 상상해볼 만한 롤모델이 없다시피 하다. 특히 지방소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직업적 다양성에 노출되어 있지 못하다. 이들 사이에선 최선을 다해 평범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분위기가 팽배하기에 선생님이나 공무원 외에 꿈꾸는 직업이 많지 않다. 책 <힐빌리의 노래> 저자로, 하층민 출신으로 변호사가 된 J.D. 밴스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갈 때 해병대 전투화와 군복 바지를 입은 과거를 회상한다. 그런 옷은 면접복으로 적절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 그런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어 몰랐다고. 밴스는 이후 예일 법대에 진학해 충격을 받았다고 썼다. 고향에서는 만나기 어렵던 변호사나 명사들을 만나는 것이 쉬워지고, 교수에게 깊이 있는 조언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눈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거다. 그는 이를 ‘정보 격차’라고 표현했다.
주변에 좋은 조언을 해줄 어른이나 친구가 별로 없다면, 그래서 가질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한정적이라면, 최선을 다하지만 어딘지 자꾸 어긋나는 느낌을 받는다면 주변의 낯섦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일단 돈을 벌어 원하는 분야를 배우고 관련된 분야에서 이미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정보 격차를 해소해나가는 것이다. 무언가에 도전하고 싶어질 때 솔직하게 상태를 말할 수 있고 긍정적인 지지를 받거나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사는 길에 가까워진다.
청춘을 위한 소설로 유명한 <데미안>에는 제목만 아는 이에게도 익숙할 만한 문장이 있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는 건 누구에게나 어렵고, 왜 이런 환경밖에 주어지지 않았는지 원망하는 건 너무 쉬워 아무나 할 수 있다. 알 속은 편안하지만 계속 머무를 수 없으니 머리로 들이받고 날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 <데미안>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깨어난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 어떤, 어떤, 어떤 의무도 없다.”
정문정
쓰는 사람.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냈다.
인스타그램 @okdommoon
조예람
사소한 주변을 담은 ‘Around Ginger’의 일러스트레이터.
인스타그램 @around_gin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