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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27. 2020

차례상 위 당신

글/사진. 이향규


엄마, 올해 차례상에는 고기도 생선도 없어요. 하늘에 계신 다른 분들이 저희가 차린 찬을 보고 가난한 밥상이라고 놀리면, 요즘은 채식이 힙한 거라고 말씀하세요. 올해 코로나19

역병이 돈 후에 채식을 선택한 이들이 많아요. 저도 평소에는 할까 말까 했는데, 이번에 전염병으로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 마음을 바꿨어요. 예전에 살던 대로 계속 살다 보면 아무래도 인류 종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차례상이 풀밭이었지만, 그래도 두부나 버섯으로 단백질은 신경 썼어요.


모계의 전통

이번 차례상 앞에서 인사드린 영국 소년은 타이라고, 우리 막내 린아의 남자친구예요.

둘이 사귄 지는 1년쯤 되었어요. 저희가 예뻐하고 있어요. 언젠가 타이에게 “린아가

너를 사랑하니, 나도 네가 좋다.”라고 말해줬어요. 그땐 별생각이 없었는데, 되돌아보니 “네가 린아를 사랑해주니, 네가 좋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 맘에 들었어요. 앞으로도 린아를 주어로 놓는 것을 잊지 않아야겠어요. 열여섯 살 동갑내기 커플이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사랑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린아가 누구를 선택하든지, 늘 아이 편에서 지지해줄 거예요.

이건 엄마한테 배운 거예요. 20년 전, 제가 토니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두 분은 처음에는 매우 난감해하셨죠. 그래도 마음을 바꾸는 데는 만 하루가 안 걸렸어요. 토요일 오후만 해도 “국제결혼 한 친구 얘기가, 외국인 남편은 평생 이방인이라고 하더라… 나는안 했으면 좋겠구나.”라고 말씀하시더니, 다음 날 아침 교회에 다녀오신 후에는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하렴.”이라 하셨죠. (급반전이라, 그날 목사님 설교 말씀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하긴 했어요.)

엄마는 이런 말을 덧붙이셨어요. “살다가,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오렴… 내가 니 아버지와 결혼할 때, 외할머니가 나한테 해준 말씀이란다.”

외할머니도, 잘 키운 큰딸이, 부모도 없는 전쟁 피난민 출신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걸 승낙하기가 어려웠겠어요. 제게 이 말은 제법 큰 힘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언젠가 딸들이 자기 짝을 찾아서 집을 떠날 때, 행복을 빌면서도, 이 말은 꼭해주려고요. “힘들면 언제든지 집으로 오렴.” 외할머니부터 시작한 이 말이 우리 딸까지 내려가면, 그건 모계로 전해지는 우리 집 전통이 되겠네요.


꽃과 사진

린아가 타이에게 차례 지내는 순서를 설명해주는 것을 들었어요. “음식을 차려놓고, 그분들을 생각하면서 두 번 반 절을 해. 그러곤 할아버지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 위에 젓가락을 올려놓고, 두 분이 편안히 드실 수 있도록 우리는 밖에 나가서 기다려. 다드셨다고 생각하면, 돌아와서 또 두 번 반 절을 하고, 그 다음에 남은 음식을 같이 먹는 거야.”

전통의례의 몇 가지 요소만 듬성듬성 엮어서 허술하기 짝이 없어요. 엄마가 차린 차례상은 홍동백서 (紅東白西) 어동육서 (魚東肉西) 조율이시 (棗栗梨枾) 같은 규칙을 지켰는데, 저는 그것도 엉터리에요. 고기, 생선 요리도 없고, 대추, 밤, 배, 감도 못 구했어요. 그리고 방이 좁아서 동서남북은 맞추지 못하고 공간 되는 대로 상을 놨어요. 형식은 취약하나, 정성을 다했다는 점은 믿어주세요. 두 분이 오늘 저희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신다는 마음으로 차린 진지상이에요. 상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국화도 놓아두었어요. 저는 소국을볼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요. 그래서 가을이 좀 힘들어요. 술은 셰리주로 준비했어요. 드셔보신 적이 없을 텐데, 맛이 달달하니 좋아하실 거예요. 그건 사위가 골랐어요.

상 위에 두 분 사진도 놓아두었어요. 사진 하면, 저는 엄마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아버지와 같이 찍어드린 사진 한 장이 떠올라요. 두 분을 소파에 앉히고, 아버지한테 엄마를 좀 안아드리라고 했죠. 아버지는 어색하게 웃었는데 그래도 사진을 보면 아버지 손이 엄마 어깨를 꽉 잡고 있어요. 엄마는 병석에 누운 지 오래되어 마르고 초췌한데도 눈은 형형하고 표정은 온화해요. 예전에 들은 강연에서 강사가 ‘자기애’에 대해 말하면서 그랬어요. 아무리 엄마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아이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자기 얼굴이 잘 나왔는지부터 본다고. 좌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웃었죠. 근데 이날 제가 찍은 사진을 보여드리니, 엄마는 이 말부터 했어요. “네 아버지는 참 미남이시구나.”

엄마는 아버지부터 보시네요… 차례상에는 두 분이 결혼하기 전에 찍은, 스물 몇 살 때의 풋풋한 사진을 놓았어요. 젊고 건강해요. 아프지도 고단하지도 않은 그 모습으로 계세요.


고마워요, 엄마

올 추석 차례는 엄마의 아들네와 줌 (zoom) 으로 연결해서 같이 지냈어요. (그쪽 차례상에 고기가 보여서 안심했네요.) 올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확실히 화상회의나 랜선 파티가 쉬워진것 같아요. 덕분에 추석을 왁자지껄 명절답게 보냈어요. 재호가 자기 컴퓨터에 있는 오래된 가족사진을 줌 화면공유로 보여주었어요. 두 집 가족이 아이들까지 다 모여서 영화 관람하듯이 옛날 사진들을 함께 봤어요. 사진이 오래된 기억을 소환했나 봐요. 나중에 마당에 나가 추석 달을 보는데 옛날 생각이 막 나는 거예요.

저는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 엄마한테 편지를 쓴 적이 있어요. 편지에 그동안 제가 상처받았던 일, 섭섭했던 일, 엄마에게 바라는 것들을 조목조목 적었죠. 눈물에 잉크가 번져 문장의 절반은 읽기도 어려웠어요. 그 와중에도 눈물 자국은 남겨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을 보니, 상처를 시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봐요.

밤에 몰래 부엌 찬장 안에 넣어두었어요. 밤에 쓴 편지는 아침이 되면 부끄러워지잖아요. 그래서 눈뜨자마자 회수했어요. 놓아둔 자리에 그대로 있더라고요. 저는 아직도 엄마가 그걸 읽었는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읽은 것 같기도 해요. 한참 후에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미안하구나. 나는 네가 바라는 것을 다 줄 수가 없구나.” 그때는 솔직히 ‘뭐 이런 엄마가 다 있나.’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게 가장 정직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요.

저 같으면 딸의 투정에 마음 상해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몰라요. “너는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바라는구나.” 그렇게 말하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엄마는 자식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남길 시간조차 없었죠. 3년이나 병상에 있었는데, 엄마의 마지막 순간은 정작 응급실 간이침대에서 갑자기 찾아왔어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각자 생각하는 엄마의 유언은 다를지도 몰라요. 제 건 이거예요. “나는 한평생 재미나게 살았다. 너희를 위해서 내 삶을 희생하지도 않았어. 그러니 너희가 내게 빚진 건 아무것도 없다. 엄마는 슬프게 살지 않았다. 그러니 불쌍한 사람으로 기억하지 말아주렴.” 저도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어요. 자식에게 마음의 짐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 엄마의 사랑이라는 것을요. 그래서 저도 엄마처럼 살려고요. 고마워요, 엄마.


이향규

남편과 두 딸,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영국에서 산다. 한국에서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했다.

지금은 집에서 글을 쓴다. <후아유>, <영국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같은 책을 냈다. 작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위 글은 빅이슈 10월호 23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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