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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28. 2020

읽지 못한 잡지

스페인에 사는 수(Sue)의 메시지를 받았다. “안녕. 아버지의 유품을 한국에 보내줘서 고마워. 이 멋진 문서를 오늘 받았어.” 따라온 사진 세 장은 유엔평화기념관 로고가 찍힌 표지, 기증서, 감사장이었다. 거기에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기증해주신 42점의 유물을 최선을 다해서 보존, 전시, 연구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답신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해먼드 씨도 기쁘고 자랑스러우실 거예요.”


전쟁의 기억


해먼드 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6월이었다. 그해 4월, 남북정상회담을 보고 나서 나는 6.25전쟁에 참전했던 영국군 장병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뭐라도 하고 싶었다. 참전 장병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평화를 바라는 기도라고 여겼다. 


사람은 어떤 인연으로 만나는 것일까. 이게 다 우연인 건지, 마음이 바라는 대로 길이 열린 것인지, 애초에 그리 될 일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검색을 하다가 이런 기사를 봤다. 2013년에 재영 한국대사관이 참전용사 수기 공모전을 열었단다. ‘데이비드 해먼드’는 수상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우리가 같은 고장에 살지 않았으면, 지역신문의 오래된 기사에서 그의 이름과 연락처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 전화번호가 지난 20년 동안 한 번이라도 바뀌었다면, 그를 만나지 못했을 거다. 

약속을 하고 그의 집을 찾았다. 오래된 물건이 잔뜩 쌓인 작은 거실에서 해먼드 씨 부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전쟁 당시 그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의무징집병이었다. 열아홉 살이었다. 22개월 동안 운전병으로 있었다. 그가 겪은 전쟁 이야기는 월동 장비도 없이 참전한 영국군이 겪은 살인적 추위, 동상 걸린 발가락을 자른 동료, 임진강 상류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중국군의 시신, 그에게 피부암을 안겨준 여름날의 강렬한 태양 같은 것이었다. 다리 밑에서 본 갓난아이의 시신 이야기도 해주었다. “태어나다가 죽었던지, 아니면 죽어서 태어난 아기 같았어요. 그 아기의 부모가 남과 북, 어느 쪽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거기 버려져 있었어요. 나는 차에 가서 야전삽을 가지고 와서 그 아기를 다리 밑에 묻어주었습니다.” 그는 이 장면만은 또렷하다고 했다. 해먼드 씨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 아기를 묻어준 것이, 그가 기억하는 전쟁의 마지막 조각이기를 바랐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데 딸이 뒷마당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거라며 달걀 꾸러미를 주었다. 나는 ‘곧 다시 오겠노라’고 인사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면서 산다.


온다고 했잖니?


2020년 1월에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해먼드 씨는 집 근처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고, 수는 스페인으로 이주하였다. 예전 집에서 그녀를 만났다. 4대째 살던 집을 이번에 팔았다며, 아버지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전쟁 관련 잡지와 책을 보여주며, 원하면 가져가라고 했다. 영국한국참전용사협회(The British Korean Veterans Association)에서 발간한 <모닝 캄(The Morning Calm)> 잡지가 20년 치나 쌓여 있었다. “아버지는 그 잡지를 소중히 여기셨어. 가끔 우리가 읽어드리기도 했지. 아버지는 글을 모르시거든.” 그가 글을 못 읽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수기도 그의 구술을 딸이 적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잡지와 책, DVD와 사진 몇 장을 챙겼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이 자료를 한국에 있는 관련 기관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해먼드 씨가 있는 요양원으로 갔다. “네가 올 거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이라고는 안 했어. 어차피 자꾸 잊어버리시거든.” 요양사가 해먼드 씨를 모시러 간 사이에 수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부축을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영국군 모자를 쓰고 정복에 입고 가슴에 휘장을 달고 있었다. 수가 물었다. “아버지, 우리가 오늘 올 줄 어떻게 알고 그렇게 차려입으셨어요?” “… 온다고 했잖니?” 설마 매일 그렇게 기다린 것일까?


책을 드렸다. 수는 내게 아버지가 나온 부분을 영어로 번역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증손주들이 할아버지께 읽어드리면 좋을 것 같다며, 그러면 그 아이들도 할아버지가 겪은 전쟁을 알게 되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해보겠다고 했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또 늘었다.      


탁송


2020년 6월, 메시지를 받았다. “아버지가 6월 4일에 돌아가셨어. 코로나19 때문에 장례식은 가족끼리 조촐하게 치렀지. 스페인이 봉쇄되는 바람에 나는 가지 못했어.” 사진으로 보내준 장례식 안내문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모임 제한조치로 인해, 데이비드의 삶을 기념하는 영국 재향군인회 행사는 차후에 마련하겠습니다. 조의금은 모두 영국 암연구재단(Cancer Research UK)에 기증합니다.’


이제 유품이 된 그의 물건은 그때까지도 내가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갈 때 직접 가져가려고 했는데, 조만간 그렇게 되긴 어려울 것이다. 미뤄두었던 숙제를 할 시간이 되었다. 유엔기념공원에 편지를 보냈다. 이러저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이 기증품을 받아줄 수 있을지 문의했다. 답신이 왔다. 감사하다고 했다. 다행이다. 며칠 후 다시 편지가 왔다. 아무래도 받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곳은 자료를 안전하게 보관할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서, 유엔평화기념관 측과 협의했는데 그쪽은 가능한 것 같다며 담당자 연락처를 보내주었다. 죄송하다는 편지에 감사하다고 답신했다. 유엔기념공원은 유엔군 전사자의 묘역을 관리하는 것이 본래 임무이니 애초에 이곳에 기증 문의를 한 내가 어리석었다. 그런데 담당자는 상황을 설명하고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그 이후 일은 순조로웠다. 유엔평화기념관의 학예사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절차를 의논했다. 마침내 자료를 DHL로 탁송했다. 닷새 만에 자료는 부산에 도착했다. 학예사는 자료를 확인하고, 모든 페이지를 사진 촬영한 후, 수장고에 격납했다. 그리고 관장은 기증자에게 증서를 발송했다. 유품을 잘 보존하고, 전시하고, 연구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나도 이번에는 약속을 지켰다.     


고리


한 사물이 어느 장소에 가게 되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사물의 여행은 방향을 바꾼다. 나는 해먼드 씨가 모아놓은 잡지가 부산까지 가게 된 것이 고맙다, 그곳은 한국전에 참전한 영국군이 첫발을 디딘 땅이다. 


영국한국참전용사협회는 1981년에 만들어졌다. ‘잊힌 전쟁’이라고 불릴 만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은 전장에서 싸우고 돌아온 지 거의 30년 만이다. 불과 30여 년 활동하다가, 2013년에 해산을 결정했다. 모두 고령이라 운영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간 34권의 잡지는,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자료는 해먼드 씨에게서 딸을 거쳐 내게 왔고, 유엔기념공원을 경유해서 유엔평화기념관의 학예사에게까지 전달되었다. 해먼드 씨는 글을 읽지 못했으나 잡지를 보관했고, 딸은 묵은 짐을 정리하면서 한 번 만났던 나를 기억해냈고, 나는 그걸 한국에 보내기로 했고, 유엔기념공원은 그것을 귀하게 보존해줄 곳을 소개해주었고, 유엔평화기념관은 그것을 받아 전문적으로 아카이빙했다. 어디에서든 그 고리가 끊어졌으면, 이렇게 훈훈하게 끝나지도 않았을 거다. 내 차례에서 고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에 안도한다. 해먼드 씨의 기억을 부산으로 보내는 것은 내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2020년에 수행한 소박한 임무였다. 완수했다.


글/ 사진.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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