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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Feb 08. 2021

기억을 담는 그릇

지난해 7월, 성당이 겨우 문을 다시 열었다. 3월에 1차 록다운(봉쇄)이 시행되면서 문을 닫은 지 넉 달 만에 예배가 가능해졌지만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았다. 전후좌우 1m 거리를 띄고 앉는다, 마스크를 쓴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미사 중에 봉헌(헌금)을 하지 않는다, 영성체(가톨릭 미사에서 예수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 때, 포도주는 생략하고 빵도 손으로만 받는다(여긴 아직도 입으로 받는 전통을 지키는 사람이 많다), 받으면서 ‘아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미사가 끝나면 바로 떠난다, 기타 등등. 교회에는 노인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스튜어드(steward)가 필요했다. 


스튜어드는 항공기 승무원처럼 사람들 곁에서 이 규칙을 잘 지키도록 안내하는 일을 한다. 미사마다 스튜어드가 두 명씩 필요했다. 70세 이하의 지병이 없는 사람 중에 자원자를 모집했는데 성당에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신부님이 미사 때마다 하도 호소해서 외면하고 버티던 나도 결국 12월에 스튜어드에 합류했다. 지금까지 다섯 번 나갔는데, 이 중 세 번이 장례미사였다. 영국에서는 지금까지 코로나19로 인한 누적 사망자가 9만 명에 달한다. 2020년 한 해 사망자 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라고 한다. 이곳에는 지금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다. 


주제곡

스튜어드로 일한 첫날도 장례미사였다. 여기 관습인지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는 노래를 틀었다. 늘 경건하던 성당 안에 그룹 퀸의 ‘I Want to Break Free’가 크게 울렸다. 음악이 끝나자 검은 정장을 입은 장의사 네 명이 무거워 보이는 관을 어깨에 메고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마다 주제곡이 있는 것 같다. 그건 고인이 생전에 좋아한 노래일 수도 있고, 가족과 친구가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가락일 수도 있다. 시어머니의 장례미사에는 아일랜드 민요 ‘아, 목동아(Danny Boy)’를 틀었다. 그분은 열여섯 살에 아일랜드를 떠났지만 마음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나 보다. 시누이는 장례미사 안내지 뒷면에 ‘그를 지켜주옵소서(An Irish Blessing)’도 넣었다. 이 기도문은 시댁 부엌에 늘 놓여 있었다. 지금 내 방에도 걸려 있는데, 시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함께 담겨 있다. 

아버지의 영결식 때 우리는 빌 더글러스의 ‘찬가(Hymn)’을 연주했다. 병원에 계실 때 들려드린 곡이다. 의식이 없으셔도 들으셨을 거다. 그건 엄마 떠나신 후에 당신 혼자 남은 텅 빈 집을 채웠던 라디오의 밤 10시 음악 프로그램 시그널이기도 하다. 우린 그걸 아버지의 주제곡으로 삼는다. 음악은 기억을 담기에 좋다. 형태에 갇히지 않고 시공간을 넘으며 여러 장면을 불러온다. 

엄마의 주제곡은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OST 중 ‘무대 위로’라는 곡이다. 내가 골랐다. 엄마 팔순 잔치 때 만들었던 영상 자료의 배경음악으로 썼다. 씩씩한데 애잔하고, 밝고 따뜻한데 눈물이 나는, 그런 곡이다. 자작자작 깔리는 작은 북소리가 뒤돌아보지 않고 걷는 발걸음 소리 같다. 초를 켜고 싶었다. 내일이 엄마 기일이다. 성당까지 30분쯤 걸으면서 이어폰으로 내내 들었다. 3차 록다운으로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텅 빈 거리를 걷는데 무대 위를 걷는 것처럼 점점 허리가 펴지고 고개가 꼿꼿해졌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내 삶의 무대에 당당히 서리라. 엄마가 늘 바라셨듯이. 



사진

며칠 전에 지인의 부친상 소식을 카톡으로 받았다. 부고에 동영상 플레이 버튼이 같이 따라왔다. 누르니 3분이 조금 넘는 추모 영상에 고인의 삶이 담겨 있었다. 한국에는 이렇게 고인을 기억하는 장례 문화가 생겼나 보다. 낯설지만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찍은 사진은 침묵 속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동안 내가 가본 한국의 장례식에서 고인의 생전 모습은 영정에만 담겨 있었다. 그런데 곱게 단장하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 사진에서 그분의 표정과 삶의 색깔을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시어머니 장례 때 영정 사진이 있었던가? 장례미사 순서지 앞에 인쇄된 고인의 사진을 영정 사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거기에는 40대의 당신이 아끼던 개를 안고 있고 있다. 지금 나보다 젊다. 시누이는 정성껏 만든 순서지 뒷면에 사진 몇 장을 더 넣었다. 열 살 무렵 고향에서 마을 어린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스무 살 즈음의 사진, 큰아이가 태어난 후 찍은 가족사진, 그 어디에도 암 투병에 지친 일흔의 노인은 없었다. 

우리 부모님의 장례도 그렇게 치러드리고 싶었다. 엄마 때는 너무 황망해서 준비하지 못했고, 아버지 장례 때는 조문보를 만들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고 사진을 골라 3단으로 접히는 6면 브로슈어에 담았다. 그걸 만들면서 아버지 삶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과학자였던 아버지가 실험실에 있는 모습을 표지로 썼다. 아버지는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언젠가 내 장례식 때도 아이들은 사진을 고를 거다. 새삼 거울 속 모습을 본다.     

 

음식

“엄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셨지?” 제사상을 차릴 수는 없지만, 기일에 엄마가 생각나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나는 엄마 하면 녹두전이 생각나.” 언니가 말했다. 엄마는 명절 때마다 녹두전을 엄청 부쳐서 자식들에게 바리바리 싸주셨다. “맞아… 녹두전을 해야겠네.” 그래서 일전에 사다둔 녹두를 밤에 물에 담가 두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콩을 비벼 껍질을 까 솎아냈다. 고사리도 불려 삶고, 숙주도 손질했다.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롭다. 근데 엄마는 녹두전을 좋아했을까? 엄마가 산더미처럼 부쳐놓은 전은 생각이 나는데, 정작 당신이 맛나게 드셨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건 엄마가 아니라 우리가 좋아한 음식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를 닮아 손이 큰가 보다. 녹두 1kg에 고사리, 숙주, 김치, 파를 잔뜩 넣어 반죽을 만들었더니 한 솥 가득하다. 전을 큼직하게 부쳤는데도 스무 장이 넘었다. 가깝게 지내는 이웃에게 나눠줬다. 오늘이 우리 엄마 기일이라고, 생전에 해주신 음식을 엄마를 기억하며 만들었다고, 한번 맛보시라고 했다. K가 문자를 보냈다. “기억하는 것은 참 멋진 일이지. 우리 엄마는 아직 몸은 우리 곁에 있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아… 그래서 나도 때때로 엄마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히 잘 먹을게. 너의 추억을 함께 나눠줘서 고마워.” 가슴이 먹먹해져서 아직 답신을 못했다.


다음 주 당번 서는 날에도 장례미사가 있다. 어떤 분의 장례인지 아직 모른다. 그날 사진을 보고, 주제곡을 듣고, 가족들의 조사를 들으면, 고인이 남긴 자리를 짐작할 수 있을 터다. 떠나가는 분들이 너무 많다. 남겨진 기억과 슬픔도 그만큼 많을 듯하다.


글/ 사진.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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